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겐 특별할 수 있는 디테일들
오래된 한옥고택을 새롭게 리모델링한다고 하면 가까운 지인이나 이웃에 사는 어르신들에게 여러가지 조언이나 제안을 듣게되는데 대략 이렇습니다. '저기는 이렇게 하는 게 맞아', '이렇게 하면 어때?', '그렇게 하는거 아냐', '나중에 후회할걸?' 선택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앞으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을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의견들을 듣고 난 뒤, 초반에 들었던 제 생각과 느낌은 아래처럼 상-중-하 이 세 가지로 나뉩니다.
오, 좋은 생각이다! : 생각이 떠오르거나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음에 쏙 드는 것도 있지만
해? 말아? : 당장 판단하기 어렵거나 나중에 되돌리기 어려운 것들은 잠시 주저하게 되고
내 취향은 아니라서.. : 그냥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은 일찌감치 후보에서 제외해버리는 것도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 아이디어에 대한 제 초반의 느낌과 결국 어떤 선택을 했고, 결과는 어떠했는지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 처음부터 내 취향은 아니라서..
- 끝까지 제 성향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
시골에서 집 앞마당에 채소를 기르는 분들은 제게 하나같이 텃밭을 추천했습니다. 도시에서 손님들이 오면 구경하고 수확하는 재미가 있을거라면서요. 마당이 크기도 적당하니 한쪽에 텃밭을 만들어서 저도 수확해서 먹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저도 자연식 먹거리를 좋아하고 채소도 즐겨 먹는 타입이긴 하지만, 역시 관리가 부담이 되었습니다. 농사도 나름 기술이 필요한데 저의 남은 시간을 농사기술을 갈고 닦는 데 쓰고싶진 않았습니다.
- 초반에는 오, 좋은 생각이다! 추진하려 했지만
- 지금 생각해보면 안하길 잘했습니다 ❌
주방에 있는 테이블이 4명이 사용할 수 있는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부족해 보였습니다. 숙소의 최대 수용인원은 성인4명, 어린이 포함해서 최대 6명이라서 이 주방에서 식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야외에 널찍한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도 불멍 시설을 염두해두고 있었는데 처음엔 야외 식사공간 한쪽 구석에 벽난로를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집 리모델링이 끝날때가 되자 시간은 꽤 많이 흘러버렸고 제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통장 잔고는 바닥나 있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공사 작업을 좀 끝내고 싶었고 어짜피 돈도 없으니 저 자리는 일단 비워두고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반년이 지난 지금의 평가는 어떨까요? '없는것이 훨씬 낫다' 입니다. 왜냐면 집 주변으로 시야가 넓게 탁 트인게 너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벽난로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야외에 더 근사한 불멍 화로를 만들었으니 결과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한 셈입니다. 지금 보니까 이 조감도만 봐도 야외 식사공간때문에 답답해 보이네요. 죽림주간에 직접 와보신 분들은 제 의견에 공감할 것 같습니다 ㅎㅎ
- 예전부터 오, 좋은 생각이다!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
숙소 주인이 직접 조합해서 만든 입욕제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재밌는 콘텐츠가 될 것 같았습니다. 고급 호텔도 아닌 이런 평범한 시골에서 천연 입욕제라뇨? 그런 의외성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욕실 두 곳 모두 욕조를 설치하고 싶었지만 욕실 한 곳의 폭이 너무 좁아서 아쉽게도 포기하고 다른 한 곳만 설치했습니다.
입욕제는 죽림주간을 찾는 분들께 미리 간단히 소개되고 있고 가끔 주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엄청 많진 않습니다, 한달에 5개 정도 팔립니다 ㅎㅎ 욕실 한 곳에서만 욕조를 놓길 잘한거죠... "그래도 여기는 다른 숙소와 다르게 이런것들이 있구나, 재밌다" 찾아주시는 분들이 이 정도로만 생각해줘도 저는 만족합니다.
입욕제는 우유분말, 히말라야 핑크소금, 말린 장미꽃잎과 말린 메리골드 꽃잎으로 구성됩니다. 우유는 피부를 촉촉하고 부드럽게 하고 물을 뿌옇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꽃잎과 대비되는 바탕색 역할을 해줍니다. 삼투압 효과가 있는 소금은 몸의 노폐물을 빼주는 역할을 해주는데 핑크소금으로 한 이유는 우유분말과 색 차이를 내서 구분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예쁘죠) 꽃잎은 사치스러운 기분을 위해서 넣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언제 꽃이 둥둥 떠 있는 물에서 목욕을 해보겠어요) 눈 앞에서 꽃잎들이 떠 있으면 기분이 묘하고 나름 재미있습니다.
- 초반에는 해? 말아? 고민이 되었지만
- 설치해보니 만족스럽습니다 ⭕️
CCTV는 처음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도둑 걱정보다는 손님들이 이 곳을 과연 안전하게 느낄 수 있을지 신경이 쓰였습니다. 집 뒷편에는 차가 지나다니는 길이 있어서 안전상의 이유때문에 담을 허리높이로 만들긴 했지만 그 외에는 담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 침입에 무방비하다는 인상이 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마을을 굉장히 안전하게 바라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불안한 점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CCTV를 생각했습니다.
제가 손님들을 감시하는 목적이 아니라 손님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요즘에는 도시의 곳곳에 CCTV가 많은데 사람들은 더이상 카메라를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너무 당연히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죠. 그래서 잘 보이는 곳에 CCTV를 설치했고 상시 녹화중이라고 써붙여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숙소를 드나드는 모습과 야외 잔디마당, 불멍하는 화로 주변이 보일 수 있는 각도로 한 대를 설치했고 지금까지는 정말 만족하고 있습니다.
- 초반에는 해? 말아? 결정을 미뤘는데
- 아직도 계속 미루는 중입니다 ❌
도시든 시골이든 방충망은 필수입니다. 창문에는 기본 방충망이 달려있지만 사람이 다니는 방 문엔 방충망을 따로 달아줘야하나 고민이 되었습니다만 저는 결정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 여름을 겪어보고 싶었습니다. 여름의 한 가운데 있는 지금, 이제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땐 방 문 방충망이 꼭 꼭 필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게 에어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방 문에 방충망이 있으면 벌레가 많은 여름에도 방 문을 열어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현대적인 도시인들은 바깥의 눅눅하고 더운 바람보다는 실내 에어컨 바람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엔 어떨까요? 그럴 때는 아예 툇마루로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방 문을 열어둘 필요가 없습니다. 더운날도, 추운날도, 온도가 딱 적당한 날도 방 문을 꼭 열어두어야 할 때는 없는 것입니다.
- 초반에는 오, 좋은 생각이다!
- 이제는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습니다. ⭕️
여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식사전용공간을 만들려는 계획은 접기로 해서 벽난로 계획도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불멍은 잠시 잊고 있다가 작년 11월에 지인들을 초청하면서 시범오픈을 하게되었고 캠핑과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 네명을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분명히 불멍을 좋아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에 남아있던 벽돌을 쌓아서 널찍한 원형 화로대를 만들었습니다. 공사기간동안 어깨너머로 전문가들에게 배운 조적실력을 발휘해보고 싶었기도 했고 그 자리가 예전에 철거작업을 하면서 나온 쓰레기를 여러번 불태웠던 장소였으니까요. 그 자리는 제가 검증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초반에 벽난로 계획에서 야외 원초적인 장작 불멍으로 변경되었지만 결과는 훨씬 만족스럽습니다. 이렇게 탁 트인 자연을 뒤로하고 벽보고 조그만 장작불 놀이라뇨. 불멍은 죽림주간에서 꼭 해야하는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고 손님들은 수많은 별 아래에서 개구리 합창단 소리를 들으며 불멍했던 순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체력과 통장 잔고가 떨어져서 계획을 변경했고 친구들을 생각하며 즉흥적으로 만들었던 결과가 이렇게 됐다는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 초반에는 오, 좋은 생각이다!
- 곰곰이 생각해보니 반드시 필요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
마을에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 한적한 편이고, 시골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라 이 곳에서 클래식 자전거를 타고 한바퀴 돌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쇼핑으로 폭풍검색을 했는데요. 제가 원하는 스타일은 클래식함이 흘러넘치는 옛날식 자전거였습니다. 아빠가 아이를 뒤에 태우고천천히 달리는 모습을 엄마가 사진으로 담는다, 이런 광경을 그려보니 너무 아름다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1월부터 날이 따뜻해지는 4월까지 손님들을 관찰하며 얻은 제가 내린 결론은 '사람들이 도무지 밖에 나가지 않는다',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바깥 풍경만 바라보며 멍때린다'는 것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떠나 모처럼 시간을 내서 자연의 힐링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자전거로 마을 한 바퀴 도는 것조차도 귀찮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자전거는 짐이 될 뿐입니다.
- 초반에는 오, 좋은 생각이다!
- 그리고 가장 최근에 개장했습니다 ⭕️
잔디마당과 수돗가가 있기 때문에 간이 수영장이 있으면 어린이들과 같이 오는 손님들의 반응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가격이 너무 비싸면 결정을 미룰수도 있었겠지만 괜찮아보이는 모델의 가격이 10만원 미만이니 충분히 도전해볼만 했습니다.
- 초반에는 내 취향은 아닌라서.. 거부했지만
- 거듭되는 피드백에 생각을 고쳐먹고 했는데 만족스럽습니다 ⭕️
작년에 한 친구가 시리얼이 봉지채로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을 보더니 호텔처럼 예쁜 통에 담아놓으라고 충고를 해줬습니다. 그것말고도 많은 충고를 들어야했던 저는 이건 또 무슨말인가, 그렇게까지 예쁜 통에서 시리얼을 꼭 먹어야하는가 강한 저항심이 들었고 일단 인터넷으로 모델을 검색해봤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결정은 미뤄졌고 시리얼은 봉지채 그대로 있었는데요. 어느 날 중학교에 다니는 제자가 놀러와서 라면을 먹다가 갑자기 "선생님, 시리얼이 예쁜 통에 있으면 더 좋겠어요" 라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반복되는 이 지적사항을 저는 더이상 무시하기 힘들었고 이 어린 중학생에게도 그렇게 보인다면 그게 맞고 저는 완전히 백기투항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시중에 판매하는 시리얼 전용제품은 여전히 제 마음에 들지 않고 마침 집에서 적당한 유리용기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교체해서 아직까지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 초반에는 내 취향은 아니라서.. 거부했지만
- 현재는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
역시 작년에 한 친구가 와서 호텔처럼 욕실 두루마리 휴지 끝을 V로 접으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저는 국내든 해외든 호텔을 다녀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무슨 말인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고하자, 친구는 별거아닌데 고급스러움과 손님을 위해 준비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처음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그런 효과가 있다고? 나라면 그런걸 보고도 그냥 별 생각없이 지나칠 것 같은데..'
하지만 시리얼 전용 통이 생각나서 제 느낌을 이제 믿기 힘들어졌습니다. 더군다나 호텔 좀 다녀본 여자가 말해주는 것이라서 호텔을 안다녀본 남자의 직감은 못미더웠습니다. 그래서 한번 해봤는데 시간이 5초밖에 걸리지 않자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해오고 있는 준비 루틴이 되었습니다. 비좁은 욕실에서 쪼그려앉아 휴지 끝을 V로 만들고 있을 때는 제 안에서 Hospitality 능력치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휴지를 V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런 사소한 휴지조차 세심하게 신경썼다는 호스트의 자세를 더 높이 사는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 제가 낸 아이디어라서 오, 좋은 생각이다!
- 힘겨운 섭외 끝에 지난 달 드디어 했습니다 ⭕️
한옥고택을 리모델링하면서 이 곳을 오직 숙소로만 이용하리라 제한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재미있는 여러가지 콘텐츠를 담을 그릇 하나 갖고 싶었고, 이제는 이 한옥집과 마당에서 다양한 시도들을 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적당한 하드웨어가 갖춰지면 그 안에 담을 소프트웨어는 무한하다. 그래서 마당에 작은 텃밭도, 별채를 짓는 결정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어있어야 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요.
첫 번째로 생각한 소프트웨어는 인디밴드의 버스킹 공연입니다. 시골에서도 이따금씩 마을축제가 열리긴 하는데요. 저는 전문MC가 출동하고 트로트 가수들이 출연하는 그런 요란하고 흥겨운 노래잔치를 상상하진 않았습니다. 여기 마을은 작기도 하거니와 조용한 점이 매력이고 무엇보다 자연풍경이 끝내주니, 그런 분위기와 어울리는 잔잔한 노래와 차분한 뮤지션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으로 버스킹을 하는 인디뮤지션들을 찾아서 다짜고짜 연락을 돌려 제 소개를 하고 공연계획을 설명했는데요. 기획이 생소했기 때문인지, 1일 숙박권이 보상의 전부라는 설명 때문인지, 수도권에서 거리가 멀기 때문인지 답변조차 듣기 어려웠습니다. 외부 뮤지션이 제 생각에 동참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프로젝트인데 다행히 대구에서 활동하는 한 밴드가 긍정적인 연락을 해 왔고 지난 6월의 어느 일요일에 죽림주간 최초로 야외 게릴라 버스킹 공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름은 '촌서트'라고 붙여봤는데요. 밴드가 공연할 때 저는 뮤직비디오를 찍었고 영상작업은 거의 마무리되어 곧 유튜브에 올릴 예정입니다. 영상이 업로드되면 밴드소개와 그날의 자세한 뒷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포스팅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