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 서로 만나는 창구는 참으로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보통 학교를 졸업하는 나이인 남자 20대후반 여자 20대 중반. 그래 여기까지만 해도 적당히 연락하고 지내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만 점점 사회생활에 접어들수록 늘어나는 야근과 부족한 휴식때문에 그 모임의 숫자는 줄어들고 나와 같이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점점 업무와 관계된 사람들로 채워진다. 그때가 남자 서른에 가까워지고, 여자는 후반에 가까워지는 나이. 그때부터 이 소개팅이라는 녀석과 본격적으로 치고받는 랠리게임이 시작된다.
어제 문득 소개팅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친구의 카톡대화때문에 갑자기 또 생각이 났다. 나는 2년전에 소개팅을 끊었다고 선언했다. 담배를 좀 끊으라는 말을 들으면 담배는 기호식품인데 왜 끊어야돼? 줄이면 되지 (나는 하루 두세개를 피는 레어한 흡연자다. 나에게는 초콜렛을 끊으라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라고 말하는데 아무도 소개팅을 끊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소개팅이야말로 인간사회를 좀먹는 암적인 존재인데 왜 끊을 생각을 하지않고 소개팅 시장에서 좀 더 먹히고 알아주는 인간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노력만 하고 있는건지 안타깝다. 어쩌다 우리 청춘들의 연애 스타트가 소개팅만 남게됐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아서 스스로 생각해본다.
소개팅으로 연인을 찾는것은 마치 축구에서 골을 넣기 위해 롱패스만 남발하는것과 매우 흡사하다. 롱패스가 뭔지 모른다면.. 뻥축구!는 들어봤을것. 공을 일단 앞으로 뻥 차고 같은편 우리 공격수가 운좋게 받아서 골을 넣어주길 바라는 플레이다. 엄청난 운을 필요로하고 미드필더 지역에서의 세밀한 패스를 생략(일부러 생략하는게 아니라 잘하지 못해서 생략하는게 안타까운경우다)하고 공을 뺏기면 안되기때문에 일단 앞으로 지르게 된다. 이와 같은 플레이는 소개팅으로 연인을 찾고싶은 마음과 매우 닮아있는데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고 가깝게 느껴지는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조건들보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나와 접점과 교감이 이뤄지고 시간이라는 물을 줘서 서서히 싹을 틔우는 과정이다. 이건 동성이나 이성이나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고 본다. 그런데 소개팅을 하게되면 상대방의 조건들이 이미 먼저 내 머리속에 들어와버린다. 그런 억지스런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기란 참 힘들다. 물론 관계를 조건으로만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수용가능하겠지만.
키워드는 '즐기다'와 '천천히'이다. 주변인들과 천천히 즐기며 부담없이 풀어가야하는데 소개팅은 내면의 불안함때문에 앞으로 내다지르는 뻥축구와 흡사하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게임이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목적이 오직 연애성사라는 결과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True아니면 False인 승부다. 만남과 대화사이에서 피어나는 수많은 재밌는 이야기거리와 신비스런 느낌들은 연애성사만을 보고 달려가는 불도저앞에 무력하다.
이건 갑자기 생각났는데 참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뻥축구는 우리편이 받으라고(그랬으면 좋겠다고) 공을 뻥 차서 높이 올리는것이기 때문에 장신공격수가 전방에서 경합해주는것이 훨씬 유리하다. 김신욱선수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한때 국가대표에 있었을때 김신욱이 나오기만 하면 미드필더에서 과정을 생략하고 무조건 차올려서 보는 내가 무진장 답답했던게 떠오른다. 소개팅도 중간과정과 스토리가 생략된 뻥축구와 같기 때문에 남는 무기라고는 외모밖에 내세울것이 없다.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카톡으로 채팅했던 여자사람친구에게 내가 소개팅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럼 무슨 방법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 물음이 이해가 전혀 안되는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느낌이 싸했다. 여러가지가 전해졌다. 왜 연애를 하지않으면 불안함을 느껴야 하는건지, 왜 이성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커뮤니티를 우리는 갖지 못하는지, 관심있는 취미활동을 낯선사람과 어울려서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내지 못하는건지, 왜 우리는 낯선사람들을 경계하면서 살면서 또 낯선 사람을 찾고있는지. 그 질문 하나에 여러가지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아래는 예전에 일기장에 썼던 글을 붙여넣기 했습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소개팅'이라는 단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당시 내가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라서 못들어봤을수도 있기 때문에 정확한 고증은 어렵지만 여하튼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대학생이 되면 주로 오갔던 얘기가 '미팅'이었다. '미팅'과 '소개팅'은 팀 대결이냐 개인 대결이냐로 구분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나뉘긴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분위기나 맥락을 짚어보자면 미팅은 마치 엠티처럼 즐거운 수다와 어색한 게임, 마치 짧은 여행을 상기시킨다면 소개팅은 결혼과 연애를 겨냥하는 맞선과 같다고나 할까. 굳이 나누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점점 미팅을 하는 문화가 사라져가고 대학생부터 늙은 직장인까지 너도나도 소개팅 소개팅 앵무새처럼 쪼아리는 이런 말들이 서서히 (아니, 진작부터) 짜증나기 시작하기에 몇자 적어본다.
말 그대로 소개팅으로 시작해서 소개팅으로 끝난다. 결혼적령기에 해당하는 젊은 남녀들이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술집에서 잔을 기울이거나, 식당이든 어디든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패턴이 그렇다. 어쩔때는 소개팅을 시켜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오랫만에 친구를 불러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가까운 인맥들은 소개를 받게되는 2차 인맥 범주가 넓지 않다고 생각되고 겹칠때도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금맥을 찾아서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를 불러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연애 화제로 몰고갈 수 있다. 사실 어느정도 적극성만 있고 과거에 1차 지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줬고, 현재 자기의 상태가 객관적으로 괜찮은 편이라면 충분히 시도해볼만 한 일이다. 이성친구(그냥 친구)가 거의 없는 사람도 있긴하는데, 그럴 경우는 또 한 사람을 거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러니까 중개인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되는 경우가 이제는 더이상 어색하지 않는 지경까지 왔다. 이런걸 부동산 업계에서는 공동중개라고 하고 수익은 반반이지만 이 소개팅 필드에서는 수익따윈 관심없고 나중에 기회를 돌려받을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쿨해질 수 있다. 내 경우에도 이런 공동중개를 통한 소개팅을 몇번 해봤는데, 그냥 느낌이 쌔하다.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라나는 아이를 남녀간의 사랑의 메타포라고 봤을 때, 공동중개로 만난 그녀와 나 사이에 느껴지는 공기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고아원에서 자라나는 불쌍한 아이같다. 물론 그런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라고 모두가 끝이 불행한건 아니지만 누구도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가정해본다면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인생을 시작하는 인생을 선택할것이다.
흔한 소개팅의 출발은 주선자의 사진교환이 끝나고 양쪽이 OK를 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여기서 대략 40%의 이탈자가 발생한다. 그러니까 소개팅이라는 담론이 오갈수는 있어도 실제로 스타트를 끊는 경우는 절반이 살짝 넘는다는 말인데 이 결과는 참가자의 연령대와 사진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즉, 만나고 싶은 이성의 조건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율이 연령대에 따라 다르다는 말인데, 자세한 통계치는 알 수 없다. 경험적으로는 나이가 많을수록 외모를 많이 본다고 생각되는데, 인내심에 한계가 온 나이많은 사람은 물불가리지 않는 모드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기때문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말하는 남자면 돼, 여자면 돼 하는 경우) 정치적인 경우도 있다. 상대의 카톡프로필사진이 맘에 들지 않지만 회사 부장님이 소개해주는 경우, 어쩔 수 없이 연락을 해서 만나야한다. 소개팅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회사생활은 오래될 것이므로. 어찌보면 이런 외모 확인과정은 나중에 시간낭비를 줄여준다는 면에서 꽤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겠지만, 얼짱각도, 과도한 사진후보정, 쓸데없는 환상주입, 외모지상주의, 내적매력 발산기회 박탈 등 많은 부작용도 동반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생물이라 불안한 감정을 못견디고 사진을 보길 원한다. 주선자도 그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두가 찬성하고 행복해하는 결정인것이다. 그래서 자기 본모습보다 20%정도 더 낫게 나온 사진 몇장을 가지고 다니는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30%가 넘어가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60%의 생존자들은 서로의 연락처를 갖게되고 거의 대부분 카카오톡으로 첫 인사를 한다. 이 방식도 소개팅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할 무렵과는 다르다. 예전 소개팅은 이랬을 것이다. 주선자가 OK하고 양쪽에게 약속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고 셋이 만나서 서로를 소개시켜주고는 분위기가 괜찮아질 무렵, 그러니까 1차 식사가 끝남과 동시에 2차는 자연스럽게 빠진다. 2차가 끝날 무렵, 서로 맘에 들면 연락처를 교환하고, 아무런 교류가 없으면 다음날 주선자가 각자에게 어제 어땠냐고 물어보면 애매하게 대답하기 뭐 이런 시나리오가 아녔을까 싶다. 하지만 이제는 커피숍에 가서도 서로 모바일로 멀리있는 친구랑 대화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런 거추장스러운 약속은 필요없다. 주선자도 굳이 나서지도 않는다. 그렇게 카톡으로 대화가 시작되면 5% 이탈자를 제외하면 거의 만나게 된다. 만나서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소개팅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의 상대적 결핍이지, 소개팅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
이토록 소개팅 이야기만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장 소개팅이 필요없었을 때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대학생때가 아닐까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여자가 8, 남자가 2인 비율의 과를 다녔다. 여자는 나이어린 남후배를 만나기가 좀 그렇지만 복학생 남자는 모든 여학우들과 만나도 다소 욕을 먹을 수 있어도 괜찮은편인데, 내가 나온 과는 학년에 90명정도, 거기서 여자가 70명정도고 군대갔다와서 들어가면 후배가 대략 5년터울이 있으니 대충 350명의 여자후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개팅을 했었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보다는 혹시 있을지 모를 금맥을 찾아 갈구했던 것이다. 지나고보면 정말 자연스러운 관계로 시작된 연애가 더할나위없이 좋다는것 알게되지만 막상 그 상황에서는 현실을 외면하고 막연한 이상을 쫓고 싶더라는 것. 이러한 심리는 꽤나 분석해볼만하지만 나는 그런 연구를 할 수 없기에 경험에 의존해서 현상들을 나열하고 그에따라 얕은 수준에서 가설들을 끼어맞출 뿐이다. 어쨌거나 이런 결과는 상당히 흥미로우면서도 불행한 일이다. 우리들은 대학생이건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샐러리맨이건 지금은 별볼일없는 고시생이건, 백수건간에 마음한켠에 대박이상형을 만나게 될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
연인을 만나는 길은 다양하다. 초등학교 동창, 직장동료, 친한친구의 친구, 어르신들의 중매, 동호회, 밤문화부킹, 채팅, 해외여행.. 사실 적어놓고 보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은게 또 현실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본 전제는 '자연스러움'이다. 연인관계도 어짜피 사람관계이기 때문에 친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하며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난 연애라는것도 어쨌든 큰 관점에서의 교우관계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교우관계를 왜 억지로 그것도 수시로 만들려고 하는가? 사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친구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만든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라고? 우리 친구의 대부분은 내가 속한 단체가 같은 공간을 제공해주고 같은 시간을 보내게 해줬기 때문에 옆에 앉은 녀석과 가까워진거지 (학교, 회사) 자발적으로 교우관계만을 위해서 get한적은 드물다 (친목동아리) 학교나 회사같은 경우를 억지로 친해졌고 나의 노력을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기엔 또 말이 억지스럽긴 하나 도대체 이성을 언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이해하기에는 필요한 설정이긴 하다. 평생 친구를 억지로 만들어본적이 없는데 활동반경이 직장내 사무실로 고정되버리는 연령대에서는 연인이 될만한 이성친구를 만날 기회가 없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수동적인 인간맺기의 패턴은 다르게 보면 나와 단체가 겹치지 않는 타인에 대해서는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아예 느끼질 못하거나 두려워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소개팅을 원하는데 자기 인맥을 벗어나서 좀 색다른 스타일의 이성을 만나고 싶어하면서도 너무 크게 벗어나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 원래의 품으로 돌아와서는 투덜대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 그래도 자기는 노력중이라고 할만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개팅 좀 해달라고, 술도 사주고, 연락도 하고, 나가서도 최선을 다한다. 나는 나의 세계를 깨려고 하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자기의 세계를 깨고 나에게 먼저 다가와주길 바라는. 이 지독한 현대인의 나약한 모습. 나는 이런 사태가 누구 탓이라고 원망하고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연애를 하고 헤어지거나 말거나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다 나왔다를 보고싶다. 결혼 적령기라는게 의미없는 단어긴 하지만 나이 찬 멀쩡한 친구들이 짝을 못찾아서, 아니 연애조차 못한채로 몇년씩 투덜대며 술자리에서 소개팅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인류가 생긴 이래로 이렇게 연애를 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을까 싶다. 그것은 전쟁도 아니고, 기아 홍수 가뭄 자연재해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게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대박만 꿈꾸고 기다리는 이런 암울한 분위기가 아닌가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