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삶을 사랑하게 된 계기

by 김정완

내 이야기를 녹음해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이전에 몇개 올린것이 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나를 드러냈고, 더 표현했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용기를 내어 영상제작을 마무리했다.


이야기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병실에서 엄마를 간호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TV소리에 깨서 보니 세월호 사고가 나오고 있었어요

생사가 오가는 병실에서 그런 뉴스를 보고있으니
죽음이라는게 되게 가까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에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이전과의 방식과 달랐다. 그 사건이 나에게는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이다. 삶을 더 사랑하게 된 계기. 죽음을 실감나게 상기하니까 삶이 다르게 보였다. 죽음이 무서워서 그런것이 아니고 오히려 죽음이 너무나 가까이 느껴졌다보니 오히려 죽음과 삶은 뒤섞여 공존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image.png 유튜브 "진짜 어쩌다보니까 시골로 오게됐는데 그게 참 신기해요"


게오르크 짐멜은 말했다. "완벽하게 안다는 것, 심리를 끝까지 파헤쳤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정신이 번쩍 들고 인간관계의 활력도 사라진다. 생산적인 관계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궁극의 최종적 진실이 있음을 예감하고 이를 존중하는데서 나오며 인격 전체로 연결된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내면의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질문의 권리를 비밀의 권리로 제한하는 섬세함과 자제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투명사회, 한병철]


서로 가까운 관계라도 모든 부분을 알고 이해해야 하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당한 다름과 '모른다'는 감각이 관계유지나 관계향상을 위한 노력의 동기가 된다. 물론 너무 다르면 문제가 되겠지만... 예전에 우치다 타츠루 선생도 그런 비슷한 글을 썼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사랑해서 포옹하는게 아니라 일단 포옹을 하면 이렇게 나와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게된다" 대충 이런 의미였다.


투명사회에서는 모든 거리(Distance)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부정성으로 간주된다. 거리는 커뮤니케이션과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런데 거리가 없다는 것은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거리의 소멸은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은 풍부한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데, 거리의 소멸은 공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가까움 속에는 멂이 기입되어 있다.

[투명사회, 한병철]


삶 속에도 죽음이 기입되어 있는걸까. 죽음을 멀리하고 없애려고만 한다면 삶이 나아질까. 그렇지않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가까움이 풍부한 공간을 바탕으로 한다는건 무슨 의미일지 생각해봤다. 아마도 거대한 공간을 가로질러 친구를 찾아갔을 때 더 반갑고 가깝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 아닐까. 같은 아파트에서 가까이 살지만 도무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이웃이 있듯, 가까움의 감각에는 멂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이 끝없는 자기 해체와 자기 재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한 것을 미워하게 되고 한번은 미워한 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간다. 그것을 위해서는 어렸을때부터 책을 매개로 '이계異界'와 '타자'를 만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우치다 타츠루]


한병철이 투명사회나, 피로사회, 에로스의 종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긍정하려면 부정이 필요하다. 어둠을 알아볼 수 있어야 빛을 제대로 다루는 사진가처럼. 매개가 책이든 SNS같은 디지털 도구이든 그것은 크게 상관없다. 다른세상, 다른사람, 빛 너머의 어둠, 삶 너머의 죽음을 서로 왔다갔다하며 해체와 재생산을 반복하며 살아가면 된다. 정반대를 떠올리는 것, 그것이 내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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