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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완 Jan 24. 2017

최근 나는 L이 성공한 인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년에 한두번씩 만나던 L이었다. 그 이상 자주 만나는 일은 없었지만 만남은 무척 각별했고 부담이 없었으며 일년을 건너뛰고 만나도 어색할 사이가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로가 서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것도 아니며 애초에 L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어떤 단체에 인연이 되어서 알게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저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L은 예전에도 성격이나 태도같은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가 이미 완성된 느낌이었고 나는 전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한두살씩 먹을수록 나는 L과 점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일년에 한두번씩 나는 약속을 잡았다. 술약속을 잡든 밥이나 커피든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L은 기본적으로 흥이 있었고 그 흥을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만날때마다 주로 술을 마셨다. 그렇다고 긴 세월동안 오로지 술만 마셨느냐. 그건 아니다. 같이 일도 몇번 해봤다. 일을 할때도 술을 마실 때처럼 비슷하다. 꾸밈이 없고 신선한 생각을 말로 세련되게 뱉어낼 줄 알며 대화의 결론은 무언가를 작게나마 생산해낸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던가 비아냥대는 일은 없다.


최근 나는 L이 성공한 인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L에게는 배울점이 많다는건 예전부터 알고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배울만한지 어떤점이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건지 알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훌륭한 사람인거지 꼭 집어서 이러이러한 점이 특별히 훌륭하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저 나에겐 L은 닮고싶은 롤모델이었다. 나는 늘 성공적인 인생을 꿈꿔왔기 때문에 내가 L을 닮고싶어한다는 말은 L은 나의 미래였다. 그렇다고 내가 L을 양파껍질을 까듯 하나하나 분석한 것은 아니었다. 실험실에 갖혀있는 연구대상도 아니고 태평양을 건너 만나본적 없는 위인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그런 학구적인 태도는 필요없었다. 그저 수없이 오고가는 대화속에서 몸 전체로 느끼고 반응하고 조금씩 닮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내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두가지를 L에게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두가지는 바로 남을 좋아하지만 남을 신경쓰지 않는 점이다. 목적어는 같지만 뜻은 완전히 다른 이 두가지는 L을 지금 모습으로 만들어준 두 갈래 뿌리라고 생각한다. 땅 속 양쪽으로 깊숙히 내린 두갈래 뿌리는 완전히 독립적이라 서로 뒤엉키는 일이 없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에도 나무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균형을 잡아준다. 여러모로 나보다 나은 L을 보면서 나는 L의 안정된 가정, 시대적 운, 타고난 실력을 부러워하며 나와 얼마간은 분리시켜왔던 것 같다. 나와는 다르다. 성별, 성격도 다를 뿐더러 무엇보다 어린시절 경험치가 완전히 달라서 저만큼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L을 내가 높이 평가하는 위치에 있게된 비결엔 그러한 부분들도 작용했겠지만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보니 위에 열거한 요인들은 푸념하고 자기합리화 하기 딱 좋은 핑계거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기 위한 진짜 비결은 저 두가지다. 돈과 재능, 빵빵한 집안이 갖춰진다면 사회적으로 성공할 확률은 높아지겠지만 그들의 인생이 스스로 만족스럽고 즐거우며 충분히 살아갈만한 인생이라 여겨지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나도 그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런식으로 속아왔던 것이다. 연봉이 올라가도 원하는 물건을 큰맘 먹고 사도 몇달 못가서 시들해지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그때문이다. 허망하게 사라지는 신기루를 좇을것이 아니라 진짜 성공적인 삶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진정한 의미의 삶을 살아간다고 내가 확신하는 사람을 만났고 술을 마시며 L의 얼굴을 보다가 갑자기 두가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위에선 말한 '남'이란 말 그대로 '남남'인 사람이다. 친구는 '남'이지만 친한 '남'이기에 범위가 좁다. 내가 말하는 '남'은 앞으로 나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이다. 좀 오바하자면 70억 전 지구인이 해당된다. 오지에 있는 외국인도 내가 여행을 가게되면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구에 오직 인간만이 '남'이 되는걸까? 동물도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그럼 식물은? 아마도 포함될 것이다.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남'은 원래 알던 단어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개념은 태도, 세계관이다. 유연하며 긍정적이고 상대가 아직 오지 않아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미 가지고 있는 친절함이다.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가 아니라 환경이 어떻게 바뀌던지간에 본인만의 태도를 확고히 가지고 부드러운 상태로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다.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필요하다면 말이다. 그야말로 열려있는 상태. 첫번째  '남을 좋아한다'라는 말은 열려있는 세계관을 뜻한다. 


그렇다면 두번째 '남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무슨말일까? 이미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존재하더라도 방해가 되는 남의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말이다. 첫번째 '남을 좋아한다'와 두번째 '남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묘하게 대비되어 그 두가지를 동시에 갖추기는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만약 첫번째만 있고 두번째가 없다면 남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만 살피며 헌신하는 인생을 사는 그런 바보가 될 것이다. 이 두가지는 수단이지 목적 자체는 아니다. 더구나 인생의 목표에 더 빨리 도달하게 만들어주는 급행열차도 아니다. 세계관이 바늘구멍처럼 좁고 주변사람들 눈치를 보며 열등감을 발판삼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도 시험에 합격할 것이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목표에 빨리 누구보다 앞질러서 도달해야 하는게 유일무이한 삶의 목적이라면 여기서 얘기하는 두가지는 전혀 쓸모가 없다. 나와 L은 각자의 목표에 즐겁게 도달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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