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잠에서 깨자마자 전날부터 참았던 배고픔을 해소할 겸
미리 찾아둔 팟타이 맛집으로 걸어가면서 동네 구경을 시작했다.
다행히 폭우는 멎었고,
밤 사이 내린 비를 머금은 도로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임. 치앙마이를 제대로 마주한 첫 모습이었다.
이번 여행을 결정하면서 기대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커피’였는데,
베트남, 에티오피아, 브라질처럼 태국 북부지역에서는 커피를 재배한다.
치앙마이에는 매림, 그리고 근처 치앙라이의 도이창 원두는 스페셜티 커피로써
신선함이나 퀄리티에 대한 인정을 받았고,
그리하여 치앙마이에는 골목 곳곳에 맛있는 스페셜티 커피 맛집과
자연 친화적인 치앙마이의 모습을 담은 카페들이 많다.
커피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공간’에 대한 흥미가 많은 터라
한국에서도 좋아하는 분위기의 카페와 맛있는 커피를 마시러 자주 다니는 편이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카페를 다니면서 커피를 마셔보기로 다짐하며 온 여행이었는데,
숙소를 나온 지 3분도 되지 않아서 마음에 쏙 드는 카페를 발견했다.
치앙마이에서의 여행이 더욱 기대가 되어 마음이 부풀었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은 주된 관광지나 도심이 아니라 산업도로였기 때문에
공장으로 보이는 큰 건물이나 빈 공터가 많았다.
어제 호스텔로 찾아오던 밤길에 이어 이른 아침에 산업도로를 걷는 사람도 나뿐이라
낯선 마음이 쉬이 가지 않았지만, 피자헛과 기아 매장을 발견하면서 경계의 마음이 서서히 풀어졌다.
역시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나라고,
모두 사람 사는 곳이지.
황량한 산업도로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자 예쁜 주택들이 가득한 동네가 나타났다.
식당은 그 동네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는데, 들어서는 손님이 나를 포함해서 모두 외국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치앙마이의 평균 물가치고는 메뉴가 비싼 편이었어서
아마 외국인의 입맛에 잘 맞춰진 음식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때의 나는 역시 현지의 맛이라며 극찬을 하면서 팟타이를 먹었고,
너무나도 입맛에 딱 맞는 음식과 청량하고 달콤하기 그지없던 망고주스로 인해
치앙마이에 대한 내적 친밀감은 급속도로 상승하게 되었다.
아침을 먹는 동안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
얼른 다음 숙소로 옮기기 위해 체크아웃 후 올드타운(Old Chiang Mai)으로 향했다.
올드 치앙마이에 예약해 둔 숙소까지는 3km였고 비가 왔지만,
걷기 운동 겸 구경을 하기 위해 걸어가 보기로 했다.
오토바이가 빽빽하게 줄 선 주차장을 지나면서 태국에 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는데,
흔히 오토바이가 주교통수단인 나라에서 날 법한 클락슨 소리를
어제부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치앙마이에서는 2차선에서도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 있는가.
눈치껏 길을 건너야 하는 이 시스템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신호등이 있어도 그냥 건너는 현지인의 기세를 보고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후 3차선의 큰 도로의 옆길을 걸어야 했는데,
반대쪽 인도로 가고 싶었지만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아 계속 못 건너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몇 분 뒤 마주친 어느 외국인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유유히 반대쪽 길로 건너가는 게 아닌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3차선이었다!)
나는 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놀라운 치앙마이의 교통 시스템을 파악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상한 규칙이 적용되는 교통이 치앙마이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커다란 단면이라 생각했다.
차와 오토바이는 도로를 쌩쌩 달리는 것 같지만 항상 주변을 살핀다.
그래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도 클락슨을 누르지 않고 길을 만들어준다.
좋은 게 좋은 치앙마이,
모두가 느리게 다니고
주변을 먼저 배려하는 치앙마이.
삶의 태도가 배인 도로의 규칙을 알게 되면서
더욱 편해진 마음으로 치앙마이를 걸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말소리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글자를 하나도 읽지 못하지만,
왠지 모르게 안전하다는 느낌에 마음이 풀어지던 곳.
30여분을 걸으니 드디어 사진으로만 봐온 올드시티 성벽이 등장했다.
이 성벽은 치앙마이를 둘러싸며 동서남북으로 문이 나있고,
내가 발견한 첫 문은 남쪽의 쌘뿡 문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게이트를 넘었다.
치앙마이의 도로는 불편하다.
울퉁불퉁하고 중간중간 사라지기도 하며,
나무가 우거지고 인도 중앙에 떡하니 길을 가로막고 있기도 한다.
덥고 습한 나라에서 비를 맞으며 고르지 않은 도로 위를 걸으며 캐리어를 끄는 건 나름 굉장히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이 모든 불편한 것들이 하루 만에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졌다.
요란하지 않고, 깔끔하지 않아서 자연스러운 모습들.
인공적인 발전을 최대한 지양하며 태초의 지구와 역사를 수호하는 길 위에서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태도와 살아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연스레 너무나도 깨끗한 한국의 도로가 생각났다.
치앙마이에 비하면 몇 시간이라도 캐리어를 끌 수 있는 잘 정비된 도로들.
그래서일까.
한국은 잘 닦인 도로를 따라 끊임없이, 그리고 더 빠르게 달려야만 하는 경기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울퉁불퉁하고, 있다가도 사라지며, 여차하면 돌아가야 하는 치앙마이의 인도를 걷다 보면
걸음을 멈추고, 그 참에 쉬기도 하고, 그 참에 풍경을 둘러보면서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쉼이 일상의 틈새마다 녹아들었다. 나의 발걸음은 이제 일부러 느려졌고, 첫날의 숙소를 떠난 지 두 시간 만에야 올드타운 숙소에 도착하게 되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시간의 틈마다 행복하다고 내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