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이렇게 어려운 거라면

모태솔로의 첫 소개팅 일기

by 눈눈

벚꽃이 다 떨어진 어느 늦은 봄, 한 번도 연애를 안해본 나를 위해 친구들이 나섰다.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는 무조건 "모솔탈출"을 시켜주겠다며 자기들의 인맥을 총동원해 소개팅을 주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연애는 해본 적 없었지만 짝사랑은 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조건은 모솔치고는 꽤나 명확한 편이었다. 아랍-두부 이론은 그때도 유효했다. 알아주던 아랍상인 나는 순둥해 보이는 이른바 순두부형 외모에만 심장이 반응했으며, 양말도 대충 신지 않을 만큼 패션에 민감한 '까리한' 남자를 좋아했다.


그렇게 확고한 외적 기준을 통과하고 성사된 나의 첫 소개팅. 근처의 한 대학교에 다니는, 제대 후 복학한 2학년 오빠였다.



안녕하세요! 소개받기로 한 이OO라고 합니다.




그 오빠에게서 첫 메시지가 오자마자 친구들은 꺅- 소리를 지르며 자기 일처럼 열광했다. 앞다투어 폰을 가져가 그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하며 여러 추측을 시작했다.

프로필 사진은 어린아이와 놀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아기랑 놀고 있는 걸 보니 다정한 성격 같다, 그냥 아이는 아니고 조카인 것 같은데 위로 누나나 형이 있을 것이고, 그럼 보나마나 애교가 많을 것이다, 운동화가 예쁜게 센스가 보통이 아니다…


한 장의 사진 만으로 그의 가족관계, 성격, 취향까지 모두 읽어낸 친구들은 잘해보라며 날 부추기기 시작했다. 오바 좀 하지 말라고 손사레를 쳤지만, 놀랍게도 연락이 길어질 수록 만나지도 않은 그를 향한 호감이 점점 커져갔다.

지금 무슨 수업을 듣고 있는지, 동아리 활동은 재밌는지, 점심은 누구와 먹었는지와 같은 내 사생활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경험은 모태솔로에게는 꽤나 즐거운 자극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만난 적은 없지만) 나와 가깝고 또 잘 맞는 사람이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 였으니까.



근데 너 그 오빠 언제만나?

2주간 환상 속에 빠져 있던 나를 깨운 것은 친구의 한마디였다. 긴 시간 연락만 하고 만난다는 말이 없으니 퍽 답답해 보였던 것이다. (나는 원래 소개팅이 그런 것인 줄 알았다.)


당장 만나자고 메세지를 보내려는 나에게 '만나자는 말은 유도해야 한다'는 연애고수 친구들의 조언이 이어졌고, 혹시나 내가 말도없이 사고를 칠까봐 내 폰을 가져가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럼 이번주 금요일 저녁에 보자!

그녀들의 작전이 통했는지 금요일 저녁에 만나자는 답장이 왔다. 인생 첫 데이트라니, 말 그대로 이건 미쳤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동대문 두타로 가서 데이트룩의 정석인 쉬폰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샀다.


시간은 너무나 느리게 갔고, 금요일이 다가올 수록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모태솔로에게는 이성과의 첫 연락과 데이트 약속이 주는 도파민이 치사량을 한참 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망의 금요일.

끝날 것 같지 않은 오전 수업들이 끝나고, 떨리는 맘으로 기숙사에 돌아와 고데기로 물결웨이브를 넣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내 첫 소개팅을 직관하겠다며 약속장소인 혜화역 근처까지 따라오겠다며 난리가 났다.


그리고 약속시간 한 시간 전, 출발하려고 하는 찰나 그에게서 카톡이 도착했다.




눈눈아 나 지갑을 잃어버렸어. 미안한데 내가 지갑 찾고 다시 연락해도 될까?




모태솔로는 '내가 다 사도 괜찮으니 만나자'고 답장하려 했지만, 연애 고수 친구들은 달랐다.

- 가만히 있으면 저 남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

- 지갑을 찾고 너에게 연락을 한다면 그 때 만나도 늦지 않으니 지금은 가만히 있어봐라.

- 지갑을 진짜 잃어버렸으면 찾고 나서 연락 오겠지만, 만나기 싫어서 핑계대는 거면 영영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다.


정갈한 물결모양으로 고데기를 하고, 샤랄라 투피스를 입은 꾸밈력 100%의 모태솔로에게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한마디는 그 어떤 소식보다 강력한 비보였다.

지갑을 찾았다는 메시지가 오길 기다렸지만 결국 일주일이 지나도 그에게서 별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다.

벚꽃이 다 지고 없던 늦봄의 어느 금요일, 내 첫 소개팅은 남자의 지갑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개팅 전에 만남이 흐지부지 되는 것 쯤이야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타격이 없지만,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개팅을 앞둔 스무살에게는 마치 실연과도 같은 아픔이었다.

스무살의 모태솔로에게 연애의 장벽은 이렇게 한 뼘 더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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