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호선 습격 사건

누가 내 코트에 껌 붙였어?

by 눈눈


전쟁 같은 9호선 급행열차


어떤 사람들에게 지하철은 대중교통 그 이상의 의미이다.

오차범위가 제일 적은 교통수단, 생계를 위한 공간, 우연한 즐거움이 생기기도 하고, 깊은 빡침이 올라오기도 하는 공간 - 이를테면 코트에 껌이 붙는다던가 하는.

그래서 저마다 지하철에서 생긴 에피소드 한 두개쯤은 가지고 있다.



청담동의 한 의류회사에서 인턴을 하던 시절, 내가 타야하는 지하철은 9호선 급행과 분당선이었다. 당시 9호선 급행은 4량 뿐이라 출퇴근 시간에는 지금보다 더 빽빽하게 실려다녔다. 역을 하나 하나 지나칠 때마다 인파에 휩쓸려 맨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기도 했고,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러차례 내렸다 타기도 했다. 내리고 보니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이 통째로 없어진 날도 있었다.


내 두 발로 선다는 것이 무의미해질 때 쯤 선정릉역에 도착한다. 분당선은 배차간격이 길어서 자칫 늦으면 오래 기다려야하기 때문에 전력질주를 한다. 이렇게 압구정로데오역까지 실려가면 나는 비로소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2번, 전쟁같은 시간을 보냈다.




누가 내 코트에 껌 붙였어?


그날도 아침 전쟁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출근 카드를 찍은 날이었다. 친구가 뒤에서 나를 부르더니, 코트에 뭐가 붙은것 같다며 손으로 털어주었다.

"어 이상하다, 안 떨어진다 이거"

몇 번 더 털어보더니 갑자기 헉 소리를 낸다.

"이거 껌 같은데? 벗어봐 빨리."

친구 말처럼 검정색 코트의 등 부분에 하얗고 끈적한 껌이 붙어있었다.

다행히 작게 붙어 있어서 물티슈로 잡아 뗐더니 대충 처치할 수 있었다. 몇 번 더 입고 세탁소에 드라이클리닝을 맡길 요량이었다.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내 등에는 비슷한 위치에 껌이 붙어있었다.

처음에는 작았던 껌이 날이 갈수록 점점 그 크기가 커져갔다. 대체 이게 어디서 붙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집 현관문을 닫고 나온 순간부터 사무실에 도착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을 찬찬히 복기했다.

며칠동안 연속적으로 껌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특정한 시간에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라는 얘기인데... 다른 사람의 코트에 껌을 붙여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밀착되어 있는 곳,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어딜까?

바로 9호선 급행열차였다.


다음날 아침, 범인을 잡기 위해 열차를 타기 전부터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방을 두리번대며 누가 나한테 껌을 붙일만한 사람인지 파악했다. 몰래 껌을 붙이는 사람은 겉모습부터 음흉한 티가 날 것 같았다. 열차에서는 뒷사람이 껌을 씹는지 안씹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서 주변을 경계했다.

압구정로데오역에 내리자마자 코트를 확인했는데, 다행히 그 날은 깨끗했다. 내 철통 경계가 제법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범인의 얼굴


내 경계가 느슨해지자 범인은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출근하고 보니 또 코트에 껌이 붙어있던 것이다. 이번엔 잡아서 망신을 줘야지.

한참을 지하철 안에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딱-" 하며 껌으로 풍선을 만들어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싸 잡았다! 저 자식이 범인이다! 큰 소리로 한마디 하려고 고개를 돌려 쳐다봤는데 세상에, 너무나 근면성실해 보이는 직장인이 껌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씨익 웃는 것이다.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른, 평범하다 못해 깔끔한 사람이길래 당연히 범인이 아니리라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릴 때 까지 그 의미모를 이상한 웃음에 대해 생각했다.


순박했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코트에는 껌이 붙어 있었다. 사람이 범인이었다.

아니 대체 왜? 멀쩡하게 생겼으면 멀쩡한 짓을 해야지 대체 왜 남의 코트에 껌을 붙이느냔 말이야?

열변을 토했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유가 어디있나. 미친놈한테 잘못 걸렸던 거지.


이후로는 출근시간을 앞당겨 전과 같은 시간에 급행열차를 타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선 미친놈이라며 열변을 토했지만 솔직히 무서웠다. 어디서부터 나를 봤을 지 모르는 일이었고, 지금은 껌을 붙이는 것이지만 혹시 다른 방법으로 나를 괴롭힌다면 어떡하지 걱정되었다.

더 이상 코트에는 껌이 묻지 않았지만 나는 늘 마음 한켠에 찝찝함을 가지고 지하철을 타야했다.



가끔 그 때 생각을 하면 궁금해진다.

내 등짝에 껌을 붙일 때 얼마나 즐거웠을까?

그걸로 출근 스트레스가 풀렸을까?

아직도 누군가의 등에 껌을 붙이고 다닐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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