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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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타필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친구 호열이 역시 나와 함께 ‘그 외 고등학교 반’에 배정을 받았던 것이다. 녀석의 사정은 나와 비슷했다. A 고등학교를 지원했다가, 떨어지고는 뺑뺑이를 돈 끝에 4지망으로 적어 낸 D 남자 고등학교에 배정이 된 것이었다.


“근데 D 학교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


우리 무리 중 유일하게 산 중턱에 있는 D 남고에 배정받은 녀석은 늘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럴 때면 녀석은 늘 쾌활하게 본인은 자전거가 있으니 상관 없다고 말했다.


“D 고등학교를 맨날 자전거로 다니면 허벅지가 터질 수도 있을 걸?”


“터지면 학교 안 가도 되니까 오히려 좋은 거지.”


호열이는 매사에 긍정적인 친구였다. 녀석은 항상 샤기 컷이라고 불리는 당시에 유행하던 머리 스타일을 고수했는데, 뒷머리를 항상 길게 기르고 다녔다. 어찌나 본인 뒷머리에 애정이 강했는지, 머리를 조금 자른 날이면 늘 우리에게 자기 머리가 어떻게 보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십 대 소년들이 친구의 머리 스타일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정말 놀리고 싶게 머리를 자른 경우를 빼면 말이다. 우리 역시 녀석의 물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녀석은 거기에 조금도 상처 받지 않은 채,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뒷머리를 애정 가득한 손길로 쓰다듬곤 했다. 호열이는 그런 녀석이었다.


선행 학습이 시작되는 날 나는 여느 날과 같이 호열이를 만나 학원으로 향했다. 늘 함께 다니던 무리가 5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다. 분명 다른 녀석들도 같은 시간에 같은 건물에서 공부하고 있을 테지만, 이제는 같이 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울적해졌다. 호열이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놈들 보내고 이제는 모르는 친구들이랑 수업을 들어야 하네.”


“그러니까.”


“그래도 새로운 반에서는 또 새로운 인연이 생기지 않겠어?”


“전에 보니까 남주가 우리랑 같은 반인 것 같더라고.”


“아, 진짜?”


나와 호열이는 언제나처럼 잡담을 하며 강의실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 두 줄로 정렬된 책상과 국방색 칠판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온 친구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보기에 오른쪽 분단은 남학생 용, 왼쪽은 여학생용으로 정해진 것 같았다. 오른편에는 학원을 다니며 얼굴을 익힌 남학생들 여럿이 삼삼오오 모여 장난을 치고 있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축구 잡지를 보는 녀석, 팔씨름 준비를 하고 있는 녀석, 중간에서 심판을 보고 있는 녀석 등등. 중학교 내내 봐온 익숙한 광경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그녀를 다시 마주한 것이. 왼쪽 분단 체리 나무 색깔의 책상들 사이로, 시금치 색깔의 교복을 입은 나리가 보였다.


그녀는 친구와 수다를 멈추고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들어온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눈이 맞았다. 우리는 어릴 때보다 조금 더 오랜 시간 눈을 맞추다, 서로가 서로의 볼이 달아오르고 있는 걸 알아차리곤, 시선을 돌렸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몸이 저릿저릿했다. 이건 무슨 기분이지? 어릴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머리에 피가 쏠리고 눈이 빨개졌다. 어지러운 것 같아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네가 안쪽 책상에 앉을 거야?“


호열이의 말이 저 멀리서 흐릿하게 들렸다. 나는 조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열이도 크로스 백을 책상 걸이에 걸더니,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호열이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렸다.


그녀는 어릴 때와 그대로였다. 피부는 어릴 때처럼 눈처럼 하얬고, 눈과 입 또한 어릴 때처럼 커다랬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깨에 닿지 않던 머리카락이 허리에 닿을 듯 길었고, 코가 조금 더 오똑해진 것 정도일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리 생각이 계속 났다. 그날 수업 시간에 무슨 과목을 들었고, 선생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뭐 이런 건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머리가 몽롱했고 몸이 약간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그런 느낌만이 들었다.


수업을 끝내는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내 뒤를 따라 나온 호열이는 그런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은 거냐고 물었고, 나는 짐짓 괜찮은 척을 했지만,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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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책 없이 뛰던 심장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다. 반 친구들과도 친해졌다. 우리 반은 총 1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6명의 진학 예정 고등학교는 총 5곳.


“그 외 고등학교 반으로 불릴만하네.”


남주의 말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남주는 호열이처럼 D 남자 고등학교에 진학 예정인 까무잡잡한 친구였다. 189의 키에 서글서글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운동을 꽤 잘해서 우리 반 사람들 모두가 남주를 좋아했다. 한번 농구를 같이한 적이 있었는데, 키가 매우 커서 림 밑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엄청났다.


남주 뿐만이 아니었다. 브릿팝을 좋아하는 성혁이라든가, 이탈리아 축구팀 AC밀란을 응원하는 경호라든가, 철권에 미쳐있는 철희 등등. 우리는 소수자라는 정체성 덕분인지 빠르게 친해졌다.


하지만 나리는 예외였다. 그녀와는 어색한 첫 만남 이후로 서로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늘 훔쳐보고 있었다. 나는 수업 시간 중에도 몇 번씩 몸을 좌우로 돌리거나, 목을 스트레칭하는 척하며 나리를 흘깃흘깃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보면 이미 나를 보고 있던 나리와 눈이 맞는다던가,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시선을 들키거나 했다. 서로서로 행동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 한 명이라도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 반의 누구보다 친해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춘기의 우리는 감정을 품은 이성에게 선뜻 먼저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서툴고 미숙했다. 특히나 남중에서 사춘기의 3년을 보낸 학생이었던 나는 여자 앞에서 용기를 낸다는 것의 의미조차 모르는 무지렁이였고, 왜 나리와는 말도 하지 않냐는 호열이의 물음에 굳이 말해야 하냐며 되려 짜증을 내기만 했다.


나의 필사적인 회피 기동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었다. 그때의 우리는 이제 피어나기 시작한 십 대 소년 소녀였다는 것이다. 서로 꽃봉오리를 막 틔워내는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낸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큰 사건임은 분명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예시를 들어 설명해 주도록 하겠다.


하루는 호열이가 학원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며 넌지시 물었다.


“너 유리 어떻게 생각하냐?”


뭘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호열이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아니, 좀…. 예쁘장하게 생기지 않았느냐고.”


나는 계단을 내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친구의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질문의 의도와 그 배경을 파악하는 데에는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이해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 걔 좋아하냐?”


내 웃음 섞인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붉어진 친구의 얼굴을 보며 매우 즐거워진 나는 이 녀석을 어떻게 더 놀려줄지 고민을 잠시 했다. 하지만 호열이의 얼굴로 향하는 혈류의 속도와 녀석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흠흠. 나는 괜한 헛기침으로 웃음기를 거두고 친구의 질문에 진중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유리 정도면 뭐…. 괜찮지. 귀엽잖아. 성격도 좋고.”


사실 나는 유리의 성격을 잘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는 바로 나리의 단짝이었다. 둘은 나와 호열이처럼 항상 짝을 지어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런 유리와 내가 자주 말을 했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지? 나는 걔가 좀 괜찮더라고. 선생님께 질문 할 때도 그렇고 여자애들이랑 말할 때 보며 엄청 귀엽다니까. 말투가 귀여워. 키도 작아서 아담한 게 말투랑 진짜 잘 어울리고. 교복 색깔도 잘 받는 거 같다니까. 시금치 색이 진짜 어울리기 힘든데….”


녀석은 나를 앞에 두고 독백인지 방백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속으로 다시 웃음이 올라왔으나, 친구의 비즈니스를 존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뭐, 걔가 좋아?”


“아니, 뭐 좋다기보다는…. 그냥 눈이 간다. 뭐 그런 거지.”


호열이는 유리가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나와 나리가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던 첫 만남 때부터 말이다. 왠지 모르게 눈길이 계속 갔다고 했다.


그랬냐고. 녀석이 말하는 동안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웃겼던 점은 그래서 그녀를 좋아하느냐는 내 물음에 녀석은 매번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대답했다는 거다.


“아니, 좋아하는 건 아니라니까. 내가 걔를 왜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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