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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May 16. 2023

'김상욱의 과학공부'를 읽고

혼돈의 세상, 자유의지는 있는가

김상욱의 과학공부(김상욱)

‘햄릿’의 작가를 아는가?’라는 질문은 교양의 기준이 되지만, ‘케플러의 법칙을 아는가?’는? 저자는 과학도 교양이라고 툭 던지고 시작한다.

독서율도 낮은데, 그중 과학서적의 비율은 참혹하다. 즐겨보는 ‘유명한’ 과학콘텐츠 크리에이터는 문을 닫는 지경이다. 코로나, 기후위기, 원전, 반도체 경쟁 등 사회 주요 이슈에는 과학이 바탕에 깔려있지만, 언론에서 알려주는 당장의 생활 지침만 알면 그만이다. 수험생은 의대만을 목표로 한지 오래며, 공학자는 생계를 위해 국외로 떠난다. 그래서, 과학자 김상욱 교수의 노력은 애처롭다.

과학자만의 ‘유명한’ 리그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미흡하나마 사명감을 갖고 거들뿐이다.

과학에서 출발하는 진리탐구와, 철학에서 출발하는 것이 결국 수렴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독서를 하는 내게, 이 책은 전자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뉴턴에서 시작된 고전역학은 세상을 예측가능한 결정론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20세기초 대두된 양자역학에서는 입자가 한순간에 여러 곳에 존재하며, 위치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확률로 표현될 뿐으로,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나머지는,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리처드 파인만의 말로 대신한다.

저자는 화두를 던진다. ’ 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

주사위를 던져 앞면 또는 뒷면이 나올 무작위성, 즉 알 수 없다는 주관적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자유의지인가? 자유의지를 도덕적 양심의 근거로 보는 철학관념이나 두뇌의 생리적 활동으로만 국한하지 말고 그 사이 어딘가, 많은 원자들의 한 집합체인 ‘내’가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미래를 담보한다고 할 수 있는가?

세상이 물리법칙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 결정론 중, 미래에 대한 답을 수식의 형태로 나타낼 수 없는 경우’란 곧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카오스, 나비효과가 그 예로, 우리 세상이 여기에 가깝다고 한다. 과학의 측정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보이지 않던 힘과 물질을 알게 되면서 예측범위가 넓어짐과 동시에, 자유의지가 개입할 범위는 줄어든다. 고전역학이 결정론을, 양자역학이 비결정론을 말하지만, 결국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듯하다.

신경과학자, 심리학자는 자유의지에 대해 줄기차게 연구하고 있다. 벤자민 리벳의 실험이 기폭제였다. 우리가 인지하기도 전에 대뇌피질이 이미 임무수행 준비를 하므로, 우리는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며 심지어, 무의식의 결정을 따르는 생체기계에 불과하다. 즉, 자유의지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 이후의 연구들은 자유의지의 부존재를 점점 선명하게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무의식에서는 먼저 무수한 의사결정을 처리하되 일부만 의식으로 드러내므로,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무의식에 대한 ‘자유거절’이라는 흥미로운 견해도 있다.

자유의지의 부존재와 결정론의 조합은 ‘운명론’이다. 신의 코딩에 의해 조작되는 행위자로서의 인간, 즉 ’ 신공지능‘이다. 결정론이라도 어차피 내가 모르니 마치 내 의지로 결정하는 것으로 보이니 다행인가? ‘모르는 것이 약’도 하나의 태도니 존중한다. 과학연구 대상으로서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정의부터 재고할 필요가 있지만, 이것은 그들의 영역으로 남긴다. 다만, 역으로 자유의지가 부정된다는 결론으로 합의된다면 다시 신 중심의 중세시대로 돌아갈 듯하여 우울해질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그에게 당시의 신진 과학자들은 반문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중요한가’ 어떤 발견이 우리의 사고, 인식범위 내에서 거부감 없이 수용되면 ‘이해된다’. 우리가 알 수 없다고, 이미 우주에 있는 사실과 법칙이 부정될 수는 없다. 이것을 확장해석하면, ’ 모르는 게 약’이 아니란 의미가 아닐까.

한편, 음주운전에 심신 미약으로 형량을 줄이는 판결은 행위자로서의 육체와 구별함으로써, 마치 ’ 자유의지‘를 더 우선시하는 법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렇다고 육체와 자유의지를 모두 갖는 일체로서의 ‘타인’의 생명을 앗을 어떤 핑계가 되지 못할 테다. 자유의지를 구속할 수없다고 면죄부를 줄 것이 아니라, 육체라도 합당하게 처벌해야지, 경감사유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잠시 옆길로 샜지만,

이 책은 또다시 질문을 던지며 마친다. 일단, 『자유의지와 과학』으로 이어놓으며, 이런 의식의 흐름 역시 결정되어 있던 건가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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