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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Jul 19. 2024

그 모든 것이 너이다

평범한 인생(카렐 차페크/ 송순섭 옮김)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 문학을 꽃피운 거장으로, ‘로봇’이란 말의 시초 <R.U.R>의 저자인 카렐 차페크. 그는 일곱 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음에도 나치에 저항하는 정치적 성향으로 끝내 수상하지 못하고, 독일이 프라하를 점령하기 몇 달 전인 1938년 크리스마스에 합병증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평범한 인생>은 <호르두발>, <별똥별>과 함께 차페크의 철학소설 3부작 중 하나로 소개된다. ‘철학소설’이란 단어는 생경하다. ‘소설’은 대부분 작가 나름의 철학을 품고 있을 테니. 철학자 차페크의 소설이기 때문일까. 덕분에 나름 정의해 본다. ‘철학자가 깊은 사유 속에서 길어 올린 통찰의 결과물- 진리라 할 수도 있다-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세상에 알리려는 문학작품’이라고.

  

공교롭게도 <평범한 인생>을 읽기 전후에 <샤이닝>(문학동네, 2024), <티벳 사자의 서>(정신세계사, 1995), <R.U.R>(이음, 2020), <이반 일리치의 죽음>(민음사, 2023)을 읽은 탓에 모두 아우르며, 죽음 직후의 시점에 우뚝 서서 세 개의 방향을 돌아보며 내뱉는다.

약간은 냉소적으로.


첫째, 내가 살아왔던 방향을 뒤돌아본다.

부유하는 기억의 조각을 갈무리하여 인생 조감도를 스케치하고 색칠한다.

시간에 따라 늘어선 무수한 삶의 흔적들 속에서 내가 설정한 주제-예를 들어, 행복, 명예, 성공, 실패-에 맞는 것들만 뽑아내고 재배열하여 하나의 그럴듯한 서사로 만든다. 몇 가지 주제를 뒤섞으면 현란하고 열정적인 삶을 그리기 수월해진다. 여기에 적절한 미사여구로 부드럽게 채색한 예쁜 액자까지 준비하면, 한 사람의 뜻깊은 인생사가 우주에 걸린다.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며 흐뭇해한다.


그러나, 분명 누군가에게는 부질없다.

‘볼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p10


둘째, 눈을 감고서 주위를 둘러본다.

죽은 이반 일리치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태도처럼, 서글프기에 앞서 허망하다.

내가 점유했던 세상의 공간이 비고 주인이 사라지자, 아직 목숨이 붙은 지인들이 탐욕스럽게 달려든다.

‘죽은 것은 내가 아니라, 그잖아’

애도의 가면은 안도의 한숨으로 벗어버리고 현실로 돌아간다. 아쉬워할 것 없다. 아니, 차라리 눈 감기 전에 먼저 주지 못했음을 아쉬워하자.

눈물 한 방울 더 베풀지 모르니.

 

셋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서서히 광명이 비춘다.

세상 일은 지우라는 듯 순백의 광명이 밀려오고 익숙하고 그립던 이들이 마중 나온다.

<샤이닝>을 읽으며 계속하여 떠오른 것은 <티벳 사자의 서>에서 죽음 직후에 마주하는 첫 단계, 즉 ‘치카이 바르도’다. 그 치카이 바르도의 단계를 문학적으로 정교하게 표현한다면 바로 <샤이닝>과 같을 것이라 평하고 싶다. <티벳 사자의 서>는 말한다.

투명한 빛을 마주할 때, ‘놀라지 마라. 이 모든 것은 네가 만든 환영이다.’


다시 돌아오면,

<평범한 인생>은 아직 인생을 항해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한다.

내 삶은 무수히 많은 선택의 분기 앞에서 사다리 타기 하듯 선을 그어 나간다. 선택의 수는 ‘나’의 정체성에서 비롯되지만 ‘나’는 유구한 선조들부터 부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의 축적이기에, 무한하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선택지들은 잔상으로 남든, 다른 차원의 ‘나’로 살아간다. 수억 마리 정자에서 선택된 단 하나의 ‘나’는 다시 선택의 연속선 위에 놓인다. 그리고 만난다. 부모를 통해 선조들과 이어지듯, 또 다른 무한한 갈래의 ‘나’들이 늘 함께 한다. 내가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듯 ‘나’로 성장하는 동안, 무수한 ‘나’들이 ‘너’가 되어 다가온다. 태초에 하나였듯 결국 ‘나’는 ‘너’이다.


‘그 모든 것이 너이다’ p238


인생을 마친 후, 누군가(노신사)가 내 자서전을 읽고 기억하며 누군가(의사)가 내 정원을 보살핀 것처럼 ‘나’는 또 다른 나인 ‘너’에게 이어지며 ’ 우리‘는 불멸하리라.  


제목을 다시 읽는다.

<모든 인생은 평범하다>


자, <평범한 인생>에 적힌 차페크의 메시지를 읽었으면 이제, 현실로 돌아오자.

‘우리’의 불멸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R.U.R>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로봇’이 새로운 종으로서 우뚝 설지 모른다.

내가 대체되어도 좋은가? 아니라면, 왜인가?

인간성을 정의할 수 있는가?

만일 인간 고유의 성질이 자유의지와 감정, 창의성이라면, 인간 종의 소멸이 곧 인간성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기에 두렵다.

선지자 차페크는 파편화될 미래를 예견하며,

동질성에 기반한 종의 유대를 제안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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