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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Jul 14. 2024

시대를 초월하여 희망을 향하는 질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김연경 옮김)

말이 필요 없는 세계 문학의 거장,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3000 여자에 다룬다는 것은 무모하고 건방질 테지만, 무릅쓰고 아직도 벅찬 감정에 경의를 담아 기록한다.


<죄와 벌>을 읽었을 때, 무엇이 옳은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인간 군상의 낱낱을 표현한 작가의 위대한 필체에 감동만 남았다. 라스콜리니코프의 현실과 사상의 결합은 전당포 노파를 죽일 정당성에 명분을 주었지만,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를 죽임으로써 모순에 빠졌다. 소냐의 숭고한 사랑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양심을 깨우고 구원한다. 살인의 이유에 그 어떤 옳고 그름이 있을지, 고매한 정신과 강박적인 이성 사이의 치열했던 정반합의 순간들을 묘사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저자 최고의 유작이자, 철학적 사상의 집대성이다. 후속작에서는 인류애를 품은 알료샤가 민중 속에 뛰어들어 현실과 이상의 모순 속에 어떻게 변해갈지, 또는 변화시킬지 구상했다고 한다. 저자의 죽음이 슬픔을 넘어 큰 상실로 다가오는 이유다.


팔 년에 걸친 유형생활 끝 사형집행 전 극적인 회생, 평생에 걸친 주기적 간질병, 그리고 가난과 도박벽으로 점철된 저자의 거친 일생은 마치 내면을 매끈하게 갈아버린 사포가 되었으리라. 신와 도덕,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넘어, 사회에 대한 메시지-특히, 다음 세대를 위해-를 던지는 그의 저작은 고전 중의 고전임이 분명하다.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탐욕적이고 호색한 인생이 배다른 세 형제(사생아 스메르쟈코프까지 넷)의 삶과 부딪쳐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죄와 벌>처럼 사건은 자체는 단순할 수 있다. 살인 사건. 그러나,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행적의 조화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꼼꼼하고 완벽하다. 아버지는 아들들에 대한 책임에 철저히 무심했다. 세 아들은 부모의 사랑이 아닌, 충실한 하인 그리고리의 애정 어린 관심을 마시고 자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성인이 된 세 아들의 성격에는 교집합이 없다.


저자가 유형생활 중 만난 일린스키 대위의 무고한 징역살이는 소설의 모티프가 된다. 대위는 부친살해 누명을 뒤집어썼고 범인의 자백으로 석방되었지만 이미 젊음은 지난 뒤였다. 그를 기리며 소설 속 첫째 아들 드미트리(미챠)의 삶에 투영한 듯하다. 변덕스럽고 호탕하지만 호색적인 드미트리는 과연 부친살해자인가. 이를 둘러싼 사건 전후의 정황과 인물들의 생각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저자의 종교관은 둘째 아들 이반의 입을 빌어 전한, 대심문관 이야기에 담겨 있다. 가장 이성적이며 신과 유물론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반의 극 중 소설로, 내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단 심판을 자행하던 대심문관에게 예수가 나타난다. 예수의 재림은 성서의 약속이자 세상의 구원이었으나 하나님의 심복인 대심문관은 치명적 논리를 펼친다. 예수가 주었던 자유가 오히려 짐이 되었다. 자유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민중은 신음하고 있기에 그들을 이끌 권위가 불가피하다. 예수의 고혈은 헛된 결말을 낳았다. 더 이상 자극하지 말고 떠나라. 예수는 아무 말 없이 떠난다. 대심문관의 말에 납득하여 떠난 것은 아닐 테다.


셋째 아들 알료샤는 현실에 봉사하는 고결한 수도자다. 저자가 제안하는 종교적 이상향은 알료샤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를 통해 드러난다. 알료샤가 일류사의 죽음 앞에 어린 친구들을 상대로 한 연설은 다음 세대를 위한 저자의 직접적인 메시지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평생 구원할 것이며, 세상의 악한 시도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지라도 서로를 기억하며 관대하고 용감한 사람이 돼라.


이폴리트 검사와 페츄코비치 변호사의 논고 및 반박은 압권이다. 독자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지만, 피고의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 측 논리와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 측 논리를 첨예하게 대립시킨다. 한마디로, 견고한 모순이다. 명석하고 예리하고 대리인들의 분석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사실에 가까워질 뿐, 결코 닿을 수 없고 정확할 수 없는, 끝없는 파이(π) 연산처럼 보인다. 저자의 머릿속에서 이토록 선명한 인물 간 대립을 그린다는 사실에 감명한다.


페츄코비치 변호사의 논변은 사건과의 사실관계를 떠나 실로 아름답다.

‘아버지들이여, 자신의 아이들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p493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표도르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내용이 방대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은 유작이다. 표도르는 죽었지만 드미트리와 그루센카, 이반과 카체리나, 알료샤의 미래는 암시만 되어 있을 뿐, 확신할 수 없다. 오늘날 대다수 삶의 군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지 않을까.


신은 존재할까. 신이 존재한다면 왜 무고하고 순수한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가? 이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신이 없으니, 모든 행위가 자유롭고 무죄라는 논리는 거부하고 싶다.

신이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구원의 약속은 믿는 자들만의 특권인가? 굳이 예수의 보혈과 제자들의 선교가 신약으로 설파된 것이 ‘나’ 개인의 믿음이면 족한 것일까? 이기적 믿음은 분명 아닐 테다. 어쩌면, 알료샤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믿음의 선교사, 신의 사제일 테다.


러시아를 넘어 인류애를 촉구하는 대서사시에서 어떤 인물에 동조할지는 독자의 선택이지만, 유신론자이든 유물론자이든 삶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해 볼 좋은 기회가 된다.


적어도 내게는,

돌고 돌아서 돈이요, 살고 살아서 사람이리니.

돈에 집착하지 말고, 남녀노소 어우러져 사는 사람 즉 진정한 ‘우리’가 되라고 말하는 듯하다.


말이 필요 없는 대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일독을 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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