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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Jul 10. 2024

광기 어린 멜랑콜리의 늪

멜랑콜리아 I-II(욘 포세/손화수 옮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한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


<샤이닝>을 읽고 빛의 환영에 흠뻑 젖어,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가볍고도 몽환적이었던 경험에 중독되었다. 빛을 마시기 위해 읽은, 욘 포세의 두 번째 책은 <멜랑콜리아 I-II>다.

늘 그렇듯, 책을 고르는 기준은 제목과 겉표지다. 책의 두께는 중요하지 않다. 솔직히 두꺼울수록 좋다.

운이 아주 좋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처럼 납기에 쫓겨 탈고 한 번 못해도 단지 글자수에 비례해 돈을 받는다는 이유로 길고 긴 작품을 만날 수도 있다.


제목을 직역하면 ‘우울증’이다. <샤이닝>은 현실에서 벌어진 하나의 사건이 점차 의식의 흐름에 따라, 현실에서 멀어지며 밝은 빛으로 향하는 ‘승천’의 흐름이었다면, <멜랑콜리아>는 그 역순으로 흘러내리는 ‘추락’으로 점철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책을 펼치고 3시간, 좀처럼 읽어나가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주인공 라스 헤르테르비그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욘 포세에게 화가 났다. ‘아니, 나 자신에게 화가 난 건가. 내 문해력의 한계인가? 내가 지금 읽고 있던 페이지가 여기였나? 방금 지나온 것 같은데’

주인공의 정신도, 내 정신도 빙글빙글 무한 반복이다.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읽고 있는 페이지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쥐고 읽지만 소용없다. 책을 펼칠 때마다 놓쳐버린 정신줄을 찾아 헤매며 결국, 난 우울해졌다.

‘독자에게 멜랑콜리아를 경험시키는 소설이구나. 역시 노벨 문학상’


멜랑콜리아 I은 노르웨이의 보르그외위섬 출신으로, 가난한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사건을 일인칭 시점으로 집요하게 휘젓는다.

운 좋게 지역 유지의 후원을 받고는, 유명한 화가 한스 구데 선생이 있는 뒤셀도르프의 예술아카데미 학생이 된다. 그런데 1853년 늦가을 오후, 아틀리에에 나가지 않고 빙켈만 씨의 하숙집 침대에 누워있다. 한스 구데가 학생들의 그림을 평가하는 날이다.

이제 라스의 의식 순환은 시작된다. 한스 구데는 내 그림이 형편없다고 할 것이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 탐탁지 않다고 하면, 고향으로 떠나야 한다. 난 아틀리에에 가야 한다. 침대에 누워 담뱃대에 불을 붙인다. 하숙집 딸 헬레네와는 연인이다. 창가에 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문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삼촌이 들어온다. 급히 나간 헬레네는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온다. 삼촌이 방을 빼라고 했단다. 난 잘못이 없다. 헬레네와 연인이다. 삼촌은 주인이 아니다. 삼촌이 나가라고 할 자격은 없다. 낮에 빈둥댄다고 한심하게 여긴다. 난 아틀리에에 가야 한다. 한스 구데는 나를 깎아내릴 것이다. 헬레네는 내가 나가길 원한다. 삼촌과 함께 있기 위해서 나를 쫓아낸다. 헬레네는 나와 연인이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 한스 구데도 그림을 잘 그린다. 헬레네는 나를 사랑한다. 난 떠날 수 없다. 그림을 못 그리는 동료화가들은 라스에게 심한 장난을 친다.

결국 1856년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입원한다. ‘여기서 나갈 거야’ 헬레네가 나타나 라스를 이끈다. 지나친 자위행위로 산드베르그 박사에게 불려 가고,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듣고 만다. ‘당신이 그 행위를 계속한다면 절대 화가가 될 수 없습니다’ 라스는 흰 눈송이가 내리는 오솔길 저 멀리에 서 있는 헬레네를 향해 걸어간다.


멜랑콜리아 II에서는 1902년 초가을, 헤르테르비그의 누나 올리네의 마지막 날로 이어진다. 그녀는 치매로 바로 전 기억도 잊을 정도이며, 한 걸음 뗄 때마다 발이 고통스럽고, 배변을 가리기 힘든 상태다. 언덕 아래에서 어부 스베인이 준 생선을 들고 언덕 위의 작고 하얀 집으로 힘겹게 향한다. 도중에 동생 쉬버트의 아내, 시그네가 부른다. 동생이 위급하니 와달라고 한다. 생선을 집에 두고 오기로 한다. 발이 아프다. 동생이 위급하다고 했다. 배가 아프다. 집에서 따로 떨어진 공용화장실을 먼저 갈지 집에 가서 요강을 이용할지 고민한다. 공용화장실로 간다. 라스의 그림이 걸려 있다. 생선을 들고 집에 간다. 알리다가 찾아와서 커피를 끓여주고 청소를 한다. 그녀가 누군지 기억나질 않는다. 라스가 돌아온 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오른다. ‘라스는 아주 특별했어’ 시그네가 찾아온다. 집 앞에 생선이 반토막 난 채 굴러다닌다고 한다. 누구의 생선인지 생각한다. 다시 생선을 구하러 언덕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친절한 스베인의 도움으로 큰 생선을 한 마리 얻었다. 다시 언덕을 오른다. 발이 아프다. 시그네가 화를 내며 쉬버트에게 데려가지만, 쉬버트는 이미 라스처럼 신에게 가버렸다. 조금뒤, 시그네의 원망을 뒤로하며 올리네 역시 빛으로 향한다.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는 실존했던 노르웨이 화가로, 그의 삶을 그린 소설이 멜랑콜리아 I이다. 책 표지에 실린 풍경화는 그의 고향 ‘보르그외위섬’으로 노르웨이의 유명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실존 인물의 삶과 의식을 나름의 필체로 적나라하게 그려낸 것이다. 욘 포세는 우울증, 치매 환자와 같은 개인 고유의 정신적 경험을 문장으로 그려낸 독창적인 화가임에 틀림없다.


광기로 고통받는 사람, 세상과 떨어져 내면 속에 침잠한 사람, 기억의 단절 속에 간절히 과거를 부르는 사람. 목 놓아 터놓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입’이 되어주지만 쉽게 부르트고 만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처럼 생채기를 내고 튀어나오기 때문에.

화자도 독자도 쓰라리다.


헬레네의 환영을 보기도 하고 모든 화가를 죽이겠다고 고함치는 라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너무나 끔찍하다며 얼른 신이 자신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는 올리네.

한없이 무겁고 어둡고 차갑기 때문에 한 장 넘기기조차 버거웠다.


책을 덮은 뒤, 우울하고 적막하다.

도대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명작일수록 독자의 수만큼 해석된다는 것을 믿으며 내 직관에게 펜을 넘긴다.


‘빛’과의 불순한 결합은 광기로, ‘빛’과의 완벽한 조우는 영생이 되는 듯하다.

라스는 삶의 중간에 빛(헬레네)을 마시는 바람에 광기에 젖고 말았지만, 올리네는 삶의 끝에서 비로소 순리대로 빛에 녹아들었다.

다행히,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도 라스를 선명히 재생함으로써 함께 빛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욘 포세가 그린 ‘빛’은 형언하기 어려운 ‘신성함’ 자체일지 모르겠다. 밝고 순수하고 조용한 빛.

삶의 찌든 때를 말끔히 지우고 본래의 맑은 영혼으로 되돌리는 치유의 빛.

아직 틔워내지 못한 꽃망울을 활짝 꽃 피우는 생의 광명.


그러나, 우리는 태생적으로 취약한 눈을 갖기 때문에. 성스러운 빛이 현실에 부대끼는 우리 존재들을 비출 때면 어김없이 발바닥에 진득하게 늘어지는 그림자,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처럼

내 눈에 보이는 그림자만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삶과 역사가 있다고 읊조린다.

행복의 저편 어둡고 추운 곳에 ‘빛’을 비추며, 돌아보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닐까.


‘뫼비우스의 띠’ 같은 문장은 어쩌면, 시간의 흐름 속에 행불행의 순환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걷다 보면 저편에 닿아 신음할 때도 있지만, 다시 걷다 보면 지금 이 자리로 돌아와 웃을 수 있다고.


한편,

내 의식 속 선무당은 조소한다.

‘대단히 불친절한 초현실주의 작품이다! 나는 쓸 테니, 너는 알아들으라는 것 아닌가!’

내 무지를 인정한다. 내게는 마르셀 뒤샹의 ‘샘’과 다를 바 없다. 너무 갔나.

그냥, ‘노르웨이 작가가 쓴 자랑스러운 노르웨이 예술가를 기리는 전기’로 기억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나는 미쳐 버렸기 때문이다’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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