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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Jul 02. 2024

가난이 우리를 갈라놓아도, 살아갈 수밖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인리히 뵐 /홍성광 옮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보고 반해버린 작가, 하인리히 뵐. 다른 저서도 찾아보리라 마음먹던 차, 또다시 매력적인 제목을 고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로 이어질 법한 앞선 상황은 어쩐지 서늘하고 꺼림직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인 듯, 화자는 앞선 상황의 가해자이거나 최소한 공범처럼 보인다. 카타리나 블룸이 퇴트게스를 쏜 직후의 문장으로 제격일 테다. 다만, 카타리나는 궁지에 몰린 피해자였다.


이 책을 감싸는 분위기는 음울하다 못해 현기증이 난다.

 

전쟁이 빚어낸 가난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것과 비교해서 나을 게 없다.

성당의 전화 교환국에서 일하는 프레드는 일을 마치면 한 상인의 아이에게 분수 계산법을 가르치고, 아버지가 전사하여 홀어미를 둔 아이에게는 라틴어를 가르친다. 일을 해도 수입은 늘 빠듯하다. 그마저 술 한 잔과 담배 다섯 개비 값만 남기고 아내에게 주어야 한다. 좁은 방 한 칸에 힘겹게 살아가는 아내 캐테와 아이들 셋을 위한 삶이야말로 폐허다.

프레드는 좁은 집에서 뛰쳐나왔다. 세상에 대한 분풀이는 가여운 아이들을 향했고, 애정이 애증으로 변질된 현실이 환멸스럽기 때문이었다. 돈을 마련하면 캐테를 만난다. 악독한 하나님 장사꾼, 프랑케 부인만 아니었어도 가족은 적어도 함께일 수 있었다. 부부는 집을 마련할 기회를 빼앗겼고, 아이들은 동심과 환희의 목소리마저 잃고 말았다.


술주정뱅이 남편을 두어도, 능력 없이 아이가 많아도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세상이었다.

연민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성당에 갇혀있고, 성당조차 드로기스트에게 좀먹고 있다.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육신은 정녕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가. 하릴없이 성호를 긋고 신에게 기도하지만, 비틀거리며 닿은 곳엔 생이별이 있고, 무덤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 관대했던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프레드에게,희망의 불씨 대신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프레드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지친 몸 누일 때, 단지 느낄 뿐이다.

‘캐테와 아이들 생각이 나면 나는 가끔 그 아래서 울기도 한다. 나는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그저 고통이라 부르고 싶은 무언가를 느낀다’ p36

 

캐테는 가녀린 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힘겹게 옮기며, 희망을 읊조린다.

‘많고 많은 석회 찌꺼기를 다 긁어 씻어 내면 나의 싸움이 끝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p59


그러나, 메마른 가슴까지 적시지 못하고 지난한 사랑은 금이 간다. 전쟁은 온전한 사랑마저 짓밟았다.

‘어쩌면,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라’ p146


곁에 없어 애달픈 사랑은 홀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영혼마저 타버린 남편을 붙잡을 힘이 없다. 더 이상 아이들을 좁은 방에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뒤돌아 누워 이별을 전한다.


커다랗던 사랑의 빈자리는 아이들로 금세 채워지지만, 이제, 아이들의 가슴과 배를 채워야 한다.

다행히, 그녀에겐 신앙이 있다.

프레드는 예상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큰 충격이었지만 이미 텅 빈 영혼을 스쳐 지났으리라.

불행히, 그에겐 세상이 지루하다.


헤어지는 길, 불타버린 담벼락에 붙은 반짝이는 현수막을 바라본다.

‘여러분, 드로기스트를 믿으세요’

그리고 그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의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이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쟁은 모두를 죄인으로 만든다.

가난, 굶주림은 냉소, 멸시, 파렴치를 넘어 비인간적 세상으로 변모시킨다. 예수가 십자가 못 박혀도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할 수 없다. 내 손에 피가 묻지 않았어도, 부당하고 원통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전쟁 없는 세상은 짧은 평화의 장막 뒤에서 또 다른 빈곤을 잉태했다. ‘가치’는 쪼개져 각자에게 할당되고 만다. 누군가에겐 돈이, 누군가에겐 명예가, 누군가에겐 사랑이 ‘가치’가 되고, 사랑조차 쪼개진다. 누군가에겐 인류를, 누군가에겐 가족을, 누군가에겐 나만을.


소설이 쓰인 1953년, 전쟁 속 폐허에서 ‘가치’의 왕좌를 두고 성당 주교와 드로기스트가 어깨를 견주었다면, 지난 70년간 종교의 권위를 내동댕이치고 드로기스트가 우위를 점하고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어 온 듯하다.


2024년 지금 지켜야 할 가치란 무엇일까.

분명, 종교나 신은 아니다. 진부하다.

결코,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좋은 환경을 꿈꾸고 아이를 환하게 배웅하길 바라는 마음이 회개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돈과 향락도 아닐 테다.


난,

프레드가 자주 찾아가 꽃 한 송이 올리던 묘지에 묻힌 그것을, 어린 시절 프레드의 어머니가 가슴에 품고 아낌없이 나누던 그것을,

어두운 성당에 들어간 캐테가 두려움에 불 붙인 성냥 끝에서, 상이군인 아버지와 가게를 꾸리는 소녀의 미소에서, 그리고 정신지체 동생을 감싸고 기도하는 소녀의 모아쥔 작은 두 손에서 밝게 빛나던 그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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