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제부터 뭘 하지
12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파리의 거리가 보였다. 아름다웠고 낯설었다. 8년 전 파리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도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처음 온 기분이 들었다.
샤워를 했다. 푹 자고 씻으니 그래도 힘이 났다.
'그래, 이제부터 뭘 하지'
노트북을 꺼내 들고 침대에 앉았다. 파리에 왔으니 가장 파리다운 것부터 보면 좋겠다. 에펠탑, 개선문, 몽마르뜨, 노틀담. 요즘은 마레지구라는 곳이 핫하다고 한다. 인터넷은 내가 갈 만한 곳들을 금방 추려주었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노틀담 사원부터 시작해 지하철을 타고 둘러보면 될 것 같았다. 어려울 건 없었다. 나도 여느 관광객처럼 이 도시를 즐기면 되었다. 무언가를 남기고 말겠다는 조바심도 잠시 접어두었다.
방에는 아직 풀지도 않은 캐리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짐을 쌀 때 무작정 쑤셔 넣었던 기억이 나서 나가기 전에 정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캐리어를 펼치는 순간 큰 비닐봉지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멕시코에서부터 묵혀둔 빨래였다. 아바나에서는 빨래가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았고, 뉴욕에서는 일정이 빡빡해 빨래방에 갈 여유가 없었다. 더 놔뒀다간 참사가 일어날 것 같아 빨래부터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검색해보니 숙소 앞에 빨래방이 있었다. 빨래를 싸들고 대충 옷을 입은 뒤 숙소를 나섰다. 동네는 조용했다. 여기는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사는 곳인 것 같았다.
빨래방에 도착해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사고, 세탁기에 빨래를 넣은 뒤 구석에 앉았다.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빨래방에는 할아버지 두 분, 아이와 함께 온 엄마, 내 나이 또래 정도 돼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있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빨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두 분은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엄마는 이제 막 말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남자 두 명은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을 한동안 지켜봤다. 할아버지들은 TV에서 뉴스가 나오자 열띤 토론을 시작했고, 엄마는 아이가 혼자 놀도록 허락한 채 책을 꺼내 읽었다. 남자들은 여전히 핸드폰에 빠져 있었다. 30분 정도가 흘렀을까. 빨래가 끝났다는 세탁기의 알림음이 울렸다. 아이와 엄마의 빨래였다. 모녀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예쁘게 갠 뒤 빨래방을 나섰다. 나는 아이가 귀여워서 그들이 귀퉁이를 지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급한 몸짓으로 세탁기 위에 있던 인형을 들더니 모녀를 쫓아 나가는 게 아닌가. 아이가 인형을 두고 간 거였다.
웃음이 났다. 그 순간부터 그들에겐 별로 특별하지 않을 일상이 특별해 보이기 시작했다. 빨래방에 있던 모녀와 남자들에게 주말마다 이 곳에 오는지, 이 곳에서 생긴 기억은 없는지 묻고 싶었다. 할아버지께는 손녀의 인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인형과 관련된 기억은 없는지 등을 여쭈고 싶어졌다. 내가 길거리 인터뷰를 하며 만난 이들에게 던졌던 질문들도 항상 그런 것들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파리에는 파리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만약 여행객에서 벗어나 그들의 삶에 더 들어갈 수 있다면 나와는 다른,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에펠탑, 개선문, 몽마르뜨, 노틀담보다는 학교에서, 집에서, 동네 식당에서, 빨래방에서 그들의 일상을 마주함으로써 만날 수 있는 작은 이야기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 미디어가 내보이는 것이 아닌 진짜 삶의 면면들을 찾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서울의 관광객이 경복궁을 많이 드나든다고 해서 서울 사람들을 잘 아는 건 아니지 않은가. 관광지로서의 파리가 아닌 진짜 파리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분명 훨씬 많은 걸 남길 것이고 기억도 더 오래갈 것이다. 8년 전의 파리 방문이 기억조차 잘 안나는 것은 내가 누구나 가는 관광지만 기계적으로 -같은 배경을 뒤로 두고 사진을 찍어가며 고작 인증을 하러 이 곳에 온 듯이- 드나든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여행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에펠탑보다는 빨래방의 모습을 보는 것. 내가 방문할 도시들의 작은 이야기들을 담는 것.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 물론 어려운 일이다. 이를 위해선 일상에 들어가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내 여행에는 시간적, 자금적 한계가 있었고 용기도 필요했다. 하지만 도전할 가치는 있었다. 어쩌면 혼자 남은 이 여행에서 나는 무언가를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물던 숙소의 체크아웃은 이틀 뒤였다. 다음 숙소는 현지인과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잡기로 했다. 그런 곳이라면 이야기의 첫 무대로 적합하다는 생각이었다. 빨래방에 앉은 채 다음 머물 곳을 찾았다. 프랑스인과 둘이 지낼 수 있는 에어비앤비가 있었다. 문의를 넣은 뒤 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사이 빨래가 다 됐다. 묵혀뒀던 빨래들이 뽀송뽀송해졌고 향기가 났다. 힘든 기억들도 함께 씻겨 내려간 듯했다. 옷을 개는데 미소가 나왔다. 빨래방에는 진짜 파리지앵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동네를 더 구경하고 싶어서 건너편 카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한 모금 마시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