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0일, 38주 1일 출산 당일.
6시 반까지 내원해야 해서 5시 반 알람을 맞춰놨는데 아무 소용없었다. 진작 일어나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출산가방을 다시 들여다보다 길을 나섰다. 혹여나 습관적으로 물이라도 한 잔 마시게 될까 봐 걱정하면서 잠에 들었다. 다행히 엄청난 각성과 긴장으로 멍청한 실수를 하진 않았다.
출산일을 정할 때 남들이 한다는 좋은 날, 좋은 시를 받는 제왕택일을 따로 하지 않았다. 그저 남편과 나의 스케줄, 그리고 아기가 충분히 클 수 있는 주수 중 가장 선호하는 날짜를 골랐을 뿐이었다. 이렇게 아기 생일을 정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간단한 절차였지만 수술일로부터 50일 전쯤 겨우 수술 시간 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출산 당일의 마음은 뭐랄까, 아무리 급해도 지갑과 여권만 있으면 여행 갈 수 있다는 마음가짐처럼, 내 몸과 PCR 결과지만 있으면 됐다. 물론 출산가방을 조금 더 잘 살펴서 꾸려갔어야 했고, 제왕절개에 대한 그리고 후처치에 대한 여러 정보를 알고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병원에서 안내받은 분만 준비사항만 가지고도 수술을 잘 마칠 수 있었다. 나에겐 현대 의학과 지난 20여 주를 함께해 준 주치의, 신생아실 선생님들과 조리원이 있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에 임하려고 노력했다.
*출산가방 리스트 (34주 후반부터 준비 시작)
아침 6시 반, 병원에 내원했고 바로 입원 수속을 진행했다. 입원 수속을 하면서 간단한 문진을 하고 1인실 입원대기를 요청했는데 9개뿐인 1인실에 순번 9번을 받았다. 새벽 6시 반인데! 아마도 당일엔 입원이 불가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다인실에 선 배정되어 입원을 준비했다.
아침 7시, 다인실에서 그나마 나은 자리라는 창가 자리를 배정받았다. 그럼에도 1평 남짓한 공간에 나와 남편과 간호사 셋이 있으려니 답답했다. 간단하게 제모를 하고 태동검사를 진행했다. 몇 시간 뒤에 아기를 만난다는 현실감은 여전히 없었다. 그저 오늘의 태동에 조금 더 집중했을 뿐이었다. 항생제 검사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두꺼운 바늘로 수술 전후로 사용할 수액 바늘을 꽂는 건 아팠다. 제왕절개라 따로 관장은 하지 않았다.
아침 8시, 분만장에 입장했다. 다시 한번 태동검사를 했다. 아기는 잘 놀고 있었고, 수액을 맞기 시작했다. 수술장이 준비되니 남편과 인사할 수 있도록 30초 남짓의 시간이 주어졌다. 분만장 앞으로 나가 "여보, 나 갔다 올게!"라고 씩씩하게 외치고 들어갔다.
아침 8시 10분, 수술장 입장. 십자가 모양의 수술대에 거대해진 몸을 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리스마 넘치는 마취과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미래와 희망은 출산 중 마취법을 선택할 수 있었고 처음엔 1번을 마음먹고 병원에 갔지만 2번을 선택했고, 결국 3번으로 출산을 마무리했다.
*미래와 희망 제왕절개 마취방법
1) 하반신 마취 - 출산 - 수면 마취로 회복실 이동
2) 수면 마취 - 출산 확인 - 수면 마취로 회복실 이동
3) 전 과정 수면 마취 - 회복, 입원실 이동 후 D+1에 아기 실물 확인
항생제 테스트에 수액을 꽂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병원에 왔구나 싶었는데, 수술장 베드에 누워 새우등을 하고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마취액이 엉덩이 부근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너무도 순진하게 이 약은 아기에게 괜찮을까라는 생각 따위를 하고 있었다.
‘타이레놀도 겨우 한 알씩 먹어왔는데, 이 약 정말 아기는 괜찮을까? 아. 이 약을 맞고 아기를 낳는 거였지. 그럼 아기가 이제 정말 태어나는 걸까?’
그 순간 긴장이 되었는지 심박수가 빨라지고 기계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마취과 선생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는 “산모님, 지금부터 벌써 긴장하면 안 돼요. 숨을 천천히 쉬고 심호흡을 계속해보세요.”라며 두어 번 말씀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이 시작되었다. 그 길로 나는 깊은 수면에 빠져 5분 후 태어난 아기의 얼굴은 결국 보지 못한 채 회복실로 옮겨졌다.
눈을 떠보니 회복실이었다. 아마도 긴장했던 탓에 수면마취 중 각성하는 단계에서 온몸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아무렴 좋았다. 눈을 뜬 곳이 회복실이어서 그리고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걱정근심이 사라졌다. 다만 아기가 조금 크다고 했다. 막달 검사와 출산 1주 전 검사에서 2.8kg로 측정됐던 아기 몸무게는 3.6kg까지 불어있었다. 그리고 수술 부위를 작게 절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가 너무 커서 몸통을 꺼낼 때 꽤 고생하셨다고 전해주셨다.
"아기가 크고 건강해! 아빠가 사진이랑 영상 많이 찍어갔으니까 입원실 가서 보세요. 축하해요."
정신은 깨었지만 하반신은 내 것이 아니었다. 이 몸으로 다인실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가 다른 층 입원실로 이동됐다. 대기 9번인 우리에게까지 1인실이 배정됐다고 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육성으로 "예스!"를 외쳤다. 남편은 그제야 처음 웃었던 것 같다.
제왕 1일 차, 진통제로 겨우 버텨냈다. 먹는 진통제, 맞는 진통제에 마약성 진통제까지 더했다. 진통제 버프를 받고 다리운동을 시작했다. 침대에서 발가락을 계속 움직이고, 발목을 돌리고, 무릎을 세워 좌우로 흔들기도 했다. 패드를 교체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엉덩이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쉽지 않았다. 수술 부위가 불타는 것처럼 아팠다. 진통제를 맞고 2~3시간에 한 번씩 계속 잠에 들었지만 깨어날 때마다 새로운 통증이 찾아왔다. 출산 6시간 만에 물을 마시고 8시간 만에 미음을 먹었다. 몸을 들 수 없어 미음을 여기저기 흘려가면서 먹었지만 정말 맛있었다.
제왕 2일 차, 소변줄을 제거했다. 이 말은 나는 4시간 이내에 직립보행에 성공해 스스로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괴로운 여정 끝에는 아기를 드디어 실물로 볼 수 있다는 엄청난 선물이 준비되어 있어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4시간이 지났지만 자가소변은 처참히 실패했다. 방광 초음파를 보고 소변줄을 다시 꽂는다는 엄포를 듣고 나서야 1시간 후 비로소 성공했다.
출산 30시간 만에 아기를 마주했다. 낯설었다. 정말 크고 동그란 달이 뜬 것 같았다. 입을 오물거리기도 하고 머리를 좌우로 열심히 밀어내며 자고 있었다. 임신기간 내내 뱃속에 떡 하니 앉아있던 역아, 동그란 머리로 갈비뼈를 밀어내던 그 모양새였다. 겨우 30cm 정도의 보폭을 유지하며 입원실로 돌아왔다. 태어난 날보다는 부기가 조금 빠진 생김새에 남편은 이제야 조금 우리 아기 같다는 말을 했다. 눈매에서 남편이, 콧방울에서 내가 보였다. 신생아실이 있는 9층과 1인실이 있는 10층 사이의 거리가 나의 회복을 도왔다. 아기를 보러 갈 때마다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 거리만큼을 기쁘게 운동할 수 있었다.
제왕 3일 차, 척추에 달려있던 무통주사를 제거하고 곧이어 수액도 제거했다. 모든 약을 복용약으로 변경했다. 무통주사 덕에 보폭도 늘어나고 걷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아침 7시부터 1~2시간에 한 번씩 신생아실에서 아기를 확인했다. 왼쪽얼굴은 못생겼다가도 오른쪽얼굴은 예뻤다. 눈을 뜨면 감격스럽다가도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짠해서 볼 수가 없었다. 분명 낯설었는데 눈을 감으면 눈앞에 그 얼굴이 아른거렸다. 핸드폰으로 찍어온 사진과 영상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아기의 안녕과 건강이 가장 중요했다. 제왕 3일 차의 통증은 그렇게 사라졌다. 물론 몸을 올릴 때마다 잡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여잡아야 했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중심을 잃었지만 할 수 있었다. 해내야만 했다.
신생아실 간호사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아기 상태에 대한 대략적인 브리핑을 해주셨다. 아기가 생각보다 예민한 지 주위 소리에 반응해 계속 깨어 울고, 밥을 먹자마자 또 달라고 운다던지, 안아달라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놀랍지도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을때면 어쩌다 나는 후진 경고음에도 칼같이 머리로 나를 밀어내던 아기였다. 사무실의 캡슐커피머신에서 들리는 일정한 진동소리에도, 텔레비전을 보며 깔깔거리는 내 큰 웃음소리에도 늘 반응했던 아기였다.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줄만 알았던 달덩이 아기가 내 뱃속에서 했던 여러 행동들을 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제왕 4일 차, 퇴원을 앞두고 정신이 없었다. 아기 옷과 바구니 카시트를 전달하고, 병원비 수납을 했다. 1인실을 사수한 덕에 130만 원 정도의 입원비용이 청구됐다. 이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지. 암. 남편은 병실 책상에 앉아 온라인 출생신고를 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맞은 진통제에 기대어 가져온 짐들을 정리하고 아기를 보러 다녀왔다. 신생아실에서 유독 많이 울었다고 전해 들어 조리원까지 가는 10분 동안 울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퇴원 전 소아과 선생님께서 회진 후 아기의 상태를 요목조목 알려주셨다. 황달 수치, 아기의 특이사항, 그리고 둔위(역아)로 태어난 아기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야 하는 점들(고관절 탈구, 발목과 무릎의 회전 등)을 설명 듣고 아기를 만났다. 유리창 너머에 있던 아기가 아닌 내 눈앞의 아기는 너무도 작고 아름다웠다.
출산의 전 과정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어색했고 낯설었다.
그저 약간의 운이 따라줬고 그 운 좋은 순간들에 집중하며 하루하루 회복에 힘썼다. 물론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과 쌓여가는 걱정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신생아실에서 본 거친 손짓에 잠못이루기도 했고, 2kg대의 아기들이 있는 침대가 아닌 신생아실 가장 안쪽 침대에 있는 가장 크고 머리도 새카만 우리 아기를 바라보는 안쓰러움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건강한 아기와 버틸만한 고통의 산모가 같은 날 같은 병원을 퇴원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러 삐걱거리는 순간들은 눈 감을 수 있었다.
진통제를 적극적으로 처방해 주는 병원과 원장님 덕에 조금 더 수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친절하게 모든 순간들을 응원해 주신 간호사 선생님들도. 다만 1인실이 안될까 봐 두려웠던 마음과 자가 소변의 엄청난 공포는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