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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Nov 24. 2020

바라던 바다

2020년 여름. 제주에서 보낸 일주일 - 세화/김녕/광치기해변

아침잠이라고는 평생에 자 본 적이 없는 우리 가족의 복병은 언제나 늦잠을 달고 사는 나와 밤낮이 바뀐 내 동생인데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 부모님은 지독한 새벽형 인간 듀오라는 말이기도 하다.


아침 5시면 일어나 부스럭거리면서 아침을 차려 먹고 6시면 외출 준비를 시작해 30분 후 휴가 중인 딸을 깨워 들처 업고 밖으로 나가는 새벽형 인간 듀오. 그렇게 여름휴가 일주일을 부지런하게 보냈다. 그 덕에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바다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었으니 부모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좋아하는 제주바다를 물어보는 질문에 이미 마음속으로 “세화 해변!”을 외치고 있는 나는 제주 동쪽 바라기다. 남편과 연애 시절부터 계절이 바뀌기가 무섭게 제주를 들락날락거렸다. 토요일 첫 비행기로 제주에 들어와 일요일 밤 비행기로 내려가는 짧은 일정, 그 이틀 동안 제주에서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늘 공항에서 적당히 가깝고도 먼 세화에 적을 두고 그렇게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주를 다녔다. 세화리에 문지방이 있었다면 닳을 정도로 그렇게 자주 애닳아 제주를 찾았다.


이번 부모님의 한 달 살기 첫 번째 숙소를 하도리로 잡은 것도 사실은 그 이유에서였다. 가장 익숙했기 때문에. 여름이면 제주 서쪽의 쪽빛 바다에 애가 닳기 마련이지만 나에게 가장 편한 동네 그리고 바다를 곁에 두고 익숙하지만 낯선 휴가를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아침엔 혼자 걷고 오후엔 함께 걷는 바다 산책을 시작했다.


세화 해변

제주에 도착하고 한 달 살기에 필요한 생필품과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세화 하나로 마트에 갔다. 이미 부모님이 엄청난 짐 꾸리기 신공으로 친정집에서 많은 짐을 싸매 들고 왔지만 그래도 과일이라도 사자며 세화로 나섰다. 그 날 봤던 세화 해변의 노을은 정말 멋졌다. 벨롱장이 열리던 세화 항구의 잔잔한 바다가 멋져 부모님을 세워두고 사진도 여러 장 남겼다. 바다를 앞에 두고 있으니 없던 스트레스마저 풀리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세화 해변을 지나가다 보면 물이 빠지고 나서 생기는 꽤 넓은 백사장에 삼삼오오 모여 해수욕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갯바위 근처에 생기는 작은 백사장에서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 얕아진 바닷가에서 수영을 즐기는 아이들. 물이 들어차면 바닷가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가까이서 밀려드는 파도를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날이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그저 바다를 곁에 두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녕 해변

어느 이른 아침 엄마 아빠는 나에게 빨랫감을 이만큼 남겨두고는 김녕 해변 근처에서 올레길에 올랐다. 코인 세탁방을 찾아 빨래를 잔뜩 넣어두고 서둘러 김녕 해변으로 차를 돌렸다. 밤새 큰 비가 내렸던 태풍의 마지막 구름이 지나간 후 바닷가엔 아무도 없었다. 언제고 바라던 바다.

 


아마도 '바다에 홀린 듯' 그 시간을 보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아침의 고요한 바다에 홀로 캠핑의자를 펴고 앉아 책을 읽었던 시간은 여름휴가 중 가장 좋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 몇 번이나 혼자 바다를 걸었지만 왜인지 겁이 나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기억. 어디서 미친 사람이 나타나 나를 바다로 끌고 갈까 겁이 났는지 아니면 이윽고 몰려 올 인파가 무서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돌이켜 보니 그저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30여 분쯤 그렇게 바다에 앉아 책을 읽다가 텅 빈 해변의 끝과 끝을 걸었다. 전무후무한 경험. 아름다운 바다를 나 혼자 차지하고 그 순간만큼은 마스크를 손에 쥘 수 있다는 짜릿한 해방감이 준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광치기 해변

세화나 김녕의 백사장은 온데간데없고 검은 모래와 자갈 그리고 썰물 때마다 슬쩍 보여주는 바다 아래 덩치 큰 기암과 이끼, 광치기 해변의 풍경은 차원이 다른 규모와 압도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광치기 해변은 올레길 1코스의 마지막 지점이라 15Km의 고행 아니 올레길을 걷고 도착한 부모님이 신발을 벗어던지고 바닷가에서 다리의 피로를 풀기도 했던 곳이었다. 바다 산책이라고는 한 번도 같이 해주지 않았던 아빠마저 바다에 들어가게 했던 광치기 해변은 바다 자체의 풍경도 물론 아름답지만 바다와 어우러지는 성산일출봉의 전경이 그 아름다움에 한몫하고 있었다.


밀물 때는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는 바다와 자갈 사이로 물 빠지는 소리가 썰물 때는 이끼로 가득 메워진 바위 위에 올라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는 게 좋았다


광치기 해변 근처 플레이스 제주에 있는 도렐에서 커피를 마시고 플레이스 제주를 돌아봤다. 소품샵에서 양말과 신발을 한참 구경하기도 하고 창문 사이로 보이는 성산일출봉을 구경하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고 광치기 해변을 걸었던 날은 물이 마침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밀물이 시작되고 5분 전엔 보였던 바다 아래 기암이 물에 덮여 사라지고 초록빛 이끼보다 검고 푸른 바다가 더 많아지는 해변의 장관을 오래도록 보다 나왔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니 언제고 볼 수 있었던 바다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아쉬웠다. 날씨와 물때에 따라 바다를 골라다녔던 적이 있었던가 하면서. 아주 먼 옛날의 여름휴가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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