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여름. 제주에서 보낸 일주일 - 거문오름/사라오름
일본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 단숨에 읽기엔 이야기가 두껍고 긴 편이지만 모든 문단에서 여름의 숲이 연상되는 그야말로 여름의 절정을 적어낸 책. 숲 속 작은 별장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 머릿속에 지어지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도쿄 근교 어딘가에 정말 있을 것 같은 별장.
여름의 모양을 볼 수 있다면 바로 이 곳 이 찰나라는 기분이 드는 곳이 있었다. 제주의 중산간로 그리고 숲과 오름. 바람의 모양이 숲 전체를 에워싸고 나무에 결을 내는 곳, 그곳의 여름은 오래도록 그 숲에 남아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번 여름 동안 걸었던 오름 두 곳의 각기 달랐던 그래서 좋았던 감상을 남겨본다.
거문 오름 트레킹
여름휴가 동안 길고 긴 장마와 태풍이 지나 습기를 가득 머금은 ‘거문오름’에 올랐다. 해설사와 단체로 올라야 하는 세계문화유산.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하루 전 예약 조건이 조금 번거로워 이제야 겨우 가볼 수 있었다.
예전엔 숲이 우거진 모습에 오름이 검게 보인다고 하여 ‘검은 오름’ 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날씨가 꽤 맑게 개인 날 오름을 올랐지만 오름 안 탐방로는 정말로 어두웠다. 곳곳에 이끼가 풀처럼 자라 있는 풍혈을 지나며 더위를 식히기도 했고 작은 노루가 숲을 가로지르며 뛰어다니는 광경을 운 좋게 마주하기도 했다.
이제 나에게 가장 태초의 제주 그리고 자연을 볼 수 있는 한 곳을 꼽으라 누가 물으면 단연 ‘거문 오름’을 소개할 것 같다. 자주 접하는 용눈이 오름이나 다랑쉬 오름같이 조금 높은 동산에 오르면 제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 즐겨 올랐는데, 거문 오름은 오히려 자연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무 아래 가려지고 그늘 속에 함께 검게 물드는 그런 기분으로 안락하면서도 조심스러웠고 신비스러웠다.
거문 오름의 자연을 유지하기 위해 전체 관람은 예약제로 진행되며, 탐방에 적합한 신발이나 옷 등의 정보 그리고 주의사항 등을 꼼꼼히 읽는 것을 추천한다.
*거문오름 탐방예약: http://www.jeju.go.kr/wnhcenter/black/black.htm
사라 오름 트레킹
지금보다 체력이 월등히 좋았던 시절 한라산 등반만을 목표로 제주에 간 적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세 번이나.
한 번은 영실 코스로 가볍게 걸었고 나머지 두 번은 백록담을 갈 수 있는 성판익 코스를 욕심내 걸었다. 백록담에 오르겠다는 마음을 먹고 걸었을 때 기억에 남는 장면은 그저 백록담 근처 마지막 대피소에서의 분주함 뿐, 오르내리는 길의 아름다운 풍경은 스쳐 지나가는 구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휴가는 짧고 한라산 (정확히는 백록담)에 가고 싶은데 도저히 짬이 안나 사라 오름에 올랐다. 성판악 코스를 따라 걷다가 중간 이정표를 보고 곁길로 빠지면 되는데 두 번이나 왔던 코스였음에도 처음 본 것처럼 그 이정표의 모습이 낯설고 생경했다.
굳은 마음을 먹고 시작해야 하는 백록담 등반 때와는 사뭇 다른, 백록담을 목표로 하지 않은 성판악 등산은 꽤 괜찮았다. 한라산의 비경인 사라 오름을 10여 년 전 일반 탐방객에게 공개하면서 자연을 해치지 않는 탐방을 위해 곳곳에 나무 데크와 계단을 만들어두었다고 한다. 그 덕에 길게 뻗은 나무와 정돈된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저 조금 높은 오름을 오르는 것 같은 편안한 발걸음으로 탐방을 마칠 수 있었다. 마음은 가벼웠지만 시간은 왕복 4시간 반 정도 걸리는 결코 쉽지 많은 않았던 코스였음은 분명하다.
사라 오름에 진입하기 전, 산정 호수를 마주했다.
사라 오름의 분화구에 물이 고여 있는 모양으로 '작은 백록담'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었다. 산정 호수를 빙 둘러 설치된 나무다리 아래로 맑게 보이는 호수 바닥이 신비로웠다. 비가 많이 온 날은 다리가 잠겨 출입이 제한되기도 할 정도로 호수와 다리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산정 호수를 빙 둘러 사라 오름 정상에 올랐다.
사라 오름 정상은 널찍한 나무 데크라 그곳에 누워 하늘과 한라산 자락을 원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올라간 높이만큼 따라오는 일정 정도의 보람이 기분 좋았다. 게다가 백록담은 가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꽤 강도 높은 산행을 한 것 같다는 대견함도 있었다. 백록담에 갈 수 없다면 사라 오름으로.
제주에서 보낸 일주일은 온몸으로 여름이라는 계절을 느낄 수 있었던 일주일이기도 했다. 태풍을 맞이하고 그 사이 맑아진 하늘을 보며 산으로 숲으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무한한 에너지와 청량함. 아마 도시에서는 그저 에어컨과 싸우느라 낭비해버렸을지 모르는 여름의 제주는 참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