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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27. 2020

10월 26일 월요일

월요일기라고 하기엔 민망한

1. 일기장

매년 9월 몰스킨의 새로운 시즌 컬러가 결정되고 나면 서둘러 일기장을 구입해왔다. 주로 데일리를 구입하고 일 년 중 반 정도를 겨우 채웠지만 ‘일기장’ 자체가 가지고 있는 든든함을 대체할 길 없어 매년 그렇게 몰스킨을 사모았다.


일기장에 펜으로 꾹꾹 눌러 담은 놀랍게도 민망한 일기들은 나조차도 다시 읽을 수 없는 글들로 채워졌지만 때로는 여행이나 출장 등의 대소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Keep a journal. 꾸준히 글을 그러니까 일기를 쓰는 것.


언젠가 읽었던 어느 기사에서 나에게 큰 울림을 준 이 문구를 몇 년간 늘 곁에 두고 살고 있지만, 어느 해보다도 지독하게 유치하고 졸렬했던 올 한 해 나의 마음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기장에 써서 남겨두면 그 마음들이 나의 기록이 되어 미래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아서 적어두지 않았다.


그런 마음들을 흘러가게 두었더니 일기장에 쓸 말이 없었다. 일기장이야말로 내 부끄러운 마음을 솔직하게 적을 유일한 창구인데 거의 절필에 가까운 의지로 일기장을 덮었다.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나니 생각보다 후련했다. 일기를 외면했다기보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달까. 하지만 이내 궁금했다. 지난달의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는지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다시 일기를 쓰기로 했다. 그 대신 외면하고 싶은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쓰기로 했다. 감정이 소모되더라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나쁜 일들까지 모조리 적어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단단한 어른이 되어 있겠지 라는 희망을 갖고.


2.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꽃을 배웠다. 그전부터 배웠던 시간을 헤아려보면 3년은 족히 되는 것 같다. 꽃을 맨 처음 시작했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은 사실 같다. 취미보다는 특기에 가깝게 잘 하고 싶다. 꽃을. 아찔하게.


일부러 세어보니 약 60여 개의 각기 다른 아이템을 배웠다. 어느 날은 그 작품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집으로 가져와 일주일 내내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두 해체해 여러 번 다시 연습을 해보기도 했다.


대부분은 꽃집을 차릴 거냐 묻고 그걸 배워 어디에 쓰냐고 마음껏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저 꽃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자 행복이라고 낯간지러워 되받아치지 못했다. 글쎄 언젠가 썼던 글처럼 요리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식당을 차릴 거냐 묻지 않고 청소를 잘하는 사람에게 청소부가 될 거냐 묻지 않는 것처럼 그저 저 좋은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봐주었으면 좋을 텐데.


꽃을 배우면서 소소하게 대소사를 챙길 수 있어 좋았다.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부케를 만들어줄 수 있었고 100일 아기를 키워 낸 친구에게 작은 상차림을 선물할 수 있었다. 가족의 생일에도 지인의 기념일에도 늘 작은 사치처럼 꽃을 선물했다. 선물이란 원래 누군가에겐 사치이고 누군가에겐 기쁨이 되는 그런 근사한 것이니까. 작은 사치를 누리며 이왕이면 멋진 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3. 휴직

웬만한 일로는 잘 아프지 않는 나는 일 년 내내 같은 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고 있다. 작년 여름 갑자기 시작된 몸의 신호로 경과를 지켜보며 추적 검사를 받는다. 오랜만에 병원을 예약하고 남편 손을 잡고 진료를 받고 나와 병원 문 앞에서 조금 울었다.


그 길로 좋아하는 커피숍에서 커피도 마시고 반찬 가게에서 나물 반찬도 잔뜩 사서 집으로 왔다. 다시 휴직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번거로웠을 일들이 휴직 덕분에 한결 가벼워졌다. 남편이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다 이것도 휴직 덕분이라고.


3번째 휴직을 시작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볍다. 짧은 출장을 앞두고 신났던 마음처럼 짧은 휴직을 앞둔 마음은 아주 즐겁다. 한 달간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잘 자고 잘 쉬어 그저 믿을 건 건강뿐인 내가 되어야지. 오늘은 왠지 계속 결심과 다짐을 하는, 화요일에 쓰는 월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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