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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19. 2020

10월 19일 월요일

너무 한낮의 산책

1. 겨울방학

여름방학을 마치고 복직 4주 차. 다음 주면 또 한 번의 짧은 방학이 시작되기 때문에 틈 날 때마다 놀 궁리를 한다. 여름 내내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통에 못 갔던 국립 중앙 박물관도 가고 싶고, 오랜만에 인왕산 자락이 보이는 블루보틀에서 커피도 마시고 싶다. 평일 낮의 서울은 어디든 여유롭지만 인기가 많이 사그라든 삼청동은 고요한 정취마저 느껴질 정도로 한산하다. 서울에서 두 번째로 맛있는 집에 앉아 노곤 노곤하게 팥죽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행복감이 밀려온다.


얼마 전 블로그를 둘러보다 제주도 한 달 살기 숙소가 50만 원이라는 글을 보고 마음이 크게 일렁였다. 일주일에 이박 삼일씩만 내려가서 묵어도 이 정도면 경제적인 선택지인 것 같은데 라는 생각에서 서둘러 현실로 돌아왔다. 여행과 일상을 그저 막연한 미래로 미뤄가며 우리는 어느 계절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2. 시험

지난여름 매일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했던 한국사 공부가 끝이 났다. 처음엔 쓸데없는 교양이나 쌓으며 그저 역사의 흐름이나 이해하자고 시작했던 공부인데 어느새 한국사 시험을 호기롭게 등록한 뼛속까지 감투의 민족인 한국사람입니다. 예.


늘 그렇듯 목표는 최고점 (1급)이지만 중간 (2급) 도 감지덕지한 현실은 바닥 (3급) 턱걸이 정도의 암기력에 충격을 금치 못하고 어제부터 암기에 열을 올렸다. 이면지를 잔뜩 꺼내서 고려부터 조선까지 손바닥에 열이나게 적으면서 예전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쉬어가는 마음으로 기출문제를 풀어봤고 탈락의 고배를 마시니 왠지 시험을 환불하는 게 정서적으로 좋지 않나라는 생각마저 드는 밤.


3. 집안일

복직을 핑계로 집안일 대부분에서 손을 뗐다. 꼭 필요한 청소와 빨래 정도만 처리하고 그 외 음식하기나 설거지는 죄다 남편의 손을 빌려하고 있다.


함께 출근과 퇴근을 하던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어떻게 식사를 꾸렸는지 모를 정도로 요즘 우리의 식사는 조금 엉망이다. 설거지거리라고는 물병과 물컵 여러 개뿐인 날들도 꽤 많아지고 주말엔 냉장고와 냉동실에 가득 찬 지난 추석의 흔적을 지우느라 여전히 바쁘다.


오늘은 김밥 두 줄에 라면을 끓여 분식 같은 저녁을 먹고 남편은 운동을 나갔다. 그리고 돌아와 하염없이 내 물 잔에 보리차를 따라주고 제사상에 올라갈 법한 크고 동그란 배를 모나지만 예쁘게 깎아 주고 잠에 들었다. 여보 조금만 참아 곧 나의 숨고 (숨은 고수) 시대가 온다. 고마워.


4. 낮

오늘은 100여 일 만에 미세먼지가 잔뜩 낀 날씨였다. 마스크를 늘 끼고 다니니 호흡기에서 오는 불편함은 좀 덜했지만 세수를 마치니 눈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랜만에 반차를 내고 좋아하는 동네를 걸으며 한낮의 햇살을 담뿍 맞았다. 연남동 동진시장 골목 끝에 있는 히메지에 사람이 가득 차있는 평일 점심시간은 사뭇 낯선 풍경이었지만 한차례 인파가 지나가고 나서 느지막이 들어가 카레도 먹고 맥주도 두어 잔 마셨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입 안에 마카롱을 쏙 넣고 걷는 기쁨을 누렸다.


마치 ‘너무 한낮의 연애’의 한 장면처럼 한낮의 회사에서 몰래 빠져나와 말도 안 되는 시간을 보내며 여유와 긴장을 동시에 마음에 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월요일의 휴가는 언제나 즐겁지만 불편한 법. 공과 사가 서로에게 폐를 끼치는 기분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퇴근 시간을 빗겨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씻고 나니 한낮의 외출이 마치 어제 일처럼 몽롱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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