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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Nov 23. 2020

11월 23일 월요일

다시 시작된 집에서의 생활

1. 외출의 기록

산책

가을의 삼청동 산책은 멋지다. 좁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불편하게 걸어야 하지만 평일의 삼청동이 어찌나 한산했는지. 내가 이 모든 풍경을 이렇게 누리는 게 미안할 지경으로 아름다웠다.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과 서촌 사이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소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 다녀왔다. 내부 인원을 제한하고 있었던 건지 혹은 그저 방문객이 없던 건지 관람을 하는 동선 중에 마주친 관람객은 한 명도 없었다.


수려한 조선시대의 보물을 하나하나 마음껏 감상했고 감상평을 소란스럽게 나눠가면서 그 여유를 즐겼다. 모든 행차의 의궤를 살펴보고 그 시대의 발명품도 돌아봤다. 한국사를 공부하고 보니 그 쓸모없는 교양이 박물관에서 십분 발현되어 정말 재미있게 관람했다. 작은 스탬프 북이 있어 도장을 찍어가며 관람했는데 스탬프 퀄리티가 예상외로 좋아 (진심으로) 감탄했다.

I’m digging 전시회

서교동의 가구점 스탠다드에이에서 전시 중인 소소문구의 아임디깅 전에 다녀왔다. 처음엔 오랜만에 문구 쇼핑을 양껏 할 수 있겠구나 (전시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음을 시사하는 부분입니다 예.)라는 심산이었는데 어느샌가 숙연해질 정도로 기록자 17명의 디깅노트에 빠져들게 되었다. 누군가는 길고양이를 돌보며 그에 대한 책을 준비하는 과정을 적기도 하고 아마도 이자람 밴드의 이자람 님은 그 날 그 날의 소리를 만들기 위한 준비과정을 적어내기도 했다.


그중 가장 감명 깊었던 기록은 올리부 님의 노트. 요즘 여러 채널을 통해 접하고 있는 올리부 님의 노트는 가히 백과사전 수준이었다. 누군가에게 전시될 목적으로 쓰여지는 그러니까 나에게 남지 않는 노트임을 알면서도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하여 기록했는지. 마스킹 테이프를 제작하는 법이나 스탬프를 만드는 법 등 자체 문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노하우를 잔뜩 적어두어 여러 장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세상은 심미적인 덕후와 귀여운 것들이 바꿀 것이야. 암.

2주 간의 꽤 촘촘하게 짜 두었던 일정이 끝나고 한 차례 큰 비가 내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2단계. 지난겨울부터 올 겨울까지 감칠맛 나게 계절을 즐기고 있다.


2. 일상 돌봄

춥지만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요즘은 밀린 빨래를 하기 딱 좋다. 쌓아뒀던 수건이나 이불을 삶아 빨기도 하고 소파 커버를 죄다 벗겨 이불 코스로 알차게 돌려 빨기도 한다. 그렇게 아침부터 부지런히 세탁을 하고 나면 햇살 앞에 반나절 빨래를 널어 둘 여유가 생긴다. 혹여 집에 건조기가 있다면 이 삶을 번거롭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예.


아침마다 가습기 필터를 꺼내어 베란다에 말리고 식사가 끝나면 오래지 않아 설거지를 한다. 틈 날 때마다 청소를 하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모든 옷을 에어 드레서에 넣고 살균 코스로 오래오래 돌려 낸다. 매 끼니마다 위아래로 여전히 가득 차 있는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정성껏 식사를 준비한다. 야채와 제철 과일을 챙겨 먹고 종종 간식도 커피도 내려 먹는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계속해서 일상을 돌본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아침이면 일어나고 퇴근을 하지 않아도 저녁은 찾아온다. 일상을 돌보는 일이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 나를 돌보는 삶.


3. 재택근무

남편의 재택근무가 또다시 시작됐다. 여전히 신난 건 나 하나. 냉장고 앞에 일주일의 식단을 정리해 붙여두고 하루 두세 번씩 산책 나갈 생각에 신나 하며 잠에 들었다.


재택 1일 차. 남편의 고관절에 갑자기 이상이 생겨 부랴부랴 병원에 갔고 급기야 걸음을 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성으로 생긴 염증이라는데 하루아침에 한쪽 다리를 못 쓸 정도로 절뚝거리다가 앓아누웠다. 하루 세 번씩 약을 챙겨 먹고 짧은 낮잠을 자기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걸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지만 산책이나 등산을 강행할 수 없는 안정기. 그래도 재택 특수 덕에 출퇴근하지 않아도 됨에 얼마나 다행인지. 게다가 또다시 위험해진 상황에 서로의 동선을 간섭하며 단란하게 실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지금이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연애 때보다 부쩍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선물 같은 올 한 해. 부디 모든 가정이 따뜻하고 평화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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