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면서 떠올리는 생각들
"2021년 고객만족 아이디어 공모전"
요즘 지하철을 기다릴 때 마다 마주쳤던 노란 포스터가 오늘도 보인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우리 지역 도시철도만의 고객만족 아이디어를 찾는 공모전이다. 고객을 만족시킬 아이디어를 고객에게 찾는다니 어쩐지 도시철도공사 본인의 일을 상금을 주고 고객들에게 미룬다는 삐딱한 생각이 함께 떠오른다.
지하철 노선도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40분의 긴 이동 시간에 빠져서는 안될 이어폰을 두고 왔다. 귀도 눈도 허전해져버렸다. 오늘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채우는 시간을 고객 만족 아이디어 떠올리기로 대신 채워본다.
공모전의 조건에 도시철도공사가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힘든 고비용, 장기간 사업은 어렵다고 되어있으니, 돈도 많이 들지 않고 실현하는데 큰 힘이 들지 않는 소소한 아이디어들을 떠올려본다.
지하철 라디오
종종 SNS에 '센스있는 기장님' '마음이 따뜻해지는 안내방송' 등의 제목으로 영상이 떠돈다. 영상 속에는 비오는 날, 긴 시간 대기하는 승객들에게 비와 어울리는 선곡과 멘트를 해주는 비행기 기장님이나 오늘도 수고했다며 도닥여주는 멘트 한 마디를 해주는 지하철 기관사님이 등장한다. 센스있는 한 마디가 기다림에 올라오는 불평과 퇴근길의 고단함을 누그러뜨린다. 승객들의 얼굴엔 미소가 떠오른다.
희망하는 (의무적으로 다 하라고 하면 숙제처럼 느껴지니까.) 기관사님들이 출근길, 퇴근길,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같은 기념일에 라디오 DJ처럼 멘트를 띄워주시면 어떨까? 크리스마스엔 캐럴을, 어린이날엔 바나나 차차가 흘러나오는 지하철이라면, 특별하지 않은 일상에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생길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면, 라디오처럼 지하철을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사연을 받아 신청곡과 함께 읽어주는 건?
'소중한 친구의 생일입니다. 12:30분 안심방면, 3-4호차에 타고 있을거에요. 생일축하노래 신청합니다.'
하고 사연을 보내고 사연이 채택되면, 신청한 시간에 노래와 축하멘트가 나오는. 지하철에 타고있는 다른 승객들에게 함께 축하받고. 잊지 못할 추억 아닐까. 너무 소란스러워지려나. 승객들 중에 성가셔할 사람들도 있으려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받아도, 해줘도 행복할 것 같다. 무표정한 얼굴로 주르륵 앉아 미리 맞춘 것 처럼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 것보단 훨씬 생동감 넘치는 지하철 풍경 아닐까?
임산부 배려석 빌런 내쫓기
지하철 중간 좌석의 제일 끝엔 혼자만 색이 다른 좌석이 하나 있다. 분홍색 시트가 덮인 '임산부 배려석' 이다. 임산부 배려석 앞 바닥에는 분홍색 굵은 시트지에 '임산부 배려석 - 하트'가 적혀있고, 좌석 뒤 벽면에도 이 자리는 임산부 배려석입니다. - 하트' 라는 안내스티커가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다. 종종, 아니 자주 생물학적으로 임산부가 될 수 없을만한 이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한번은, 그 앞에 임산부 뱃지를 달고있는 임산부가 서 있는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가장 조심해야하는 임신 초기의 임산부는 아직 배가 눈에 띄게 나오지 않아 임신여부를 육안으로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진짜 임산부 맞아?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감수하고 '저 임산부인데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라고 양보를 구하는 불편한 요청을 하지 않게 하려고 이 분홍색 자리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자리의 진짜 주인들을 위해 비워둬야하는게 맞다. 임산부 배려석 옆에 스피커를 하나 달아두고, cctv에 임산부 배려석 빌런이 포착되면 안내 멘트를 하나 내보내면 어떨까?
'삼촌, 여긴 저와 엄마를 위한 자리에요.'
'할아버지, 여긴 저와 엄마를 위한 자리에요.'
음. 임산부가 아닌데 앉는 여성 빌런들은 어찌해야할까.
거기까지 생각할 시간이 없다. 벌써 내려야할 때가 됐다. 공모전에 응모하면 채택될 리 없는 아이디어겠지만, 덕분에 이어폰 없이도 무료하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