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의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이 악보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2악장의 마지막 네 마디다. 세 번의 rf (린포르찬도, 그 음만 세게)로 마지막 선율을 표현한 뒤, pp(피아니시모, 매우 여리게) 로 숨죽이듯 마무리 해야한다. 레슨 시간에 이 구간을 연주할 때면,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쉼표' 다.
다시 악보를 살펴보자. 1-3마디의 앞부분엔 둥근 가지에 끝에 까만 열매가 하나 달린 8분 쉼표가 하나씩 있고, 4마디에는 열매 두 알이 나란히 달린 16분 쉼표가 두 개 있다. 쉼표는 말 그대로, 정해진 박자만큼 연주를 쉬라는 표시다. 8분 쉼표는 1/2박을, 16분 쉼표는 1/4박을 쉬어야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바로 '제대로' 쉬는 것인데, 건반에서 손가락을 완전히 떼고 소리의 잔향을 줄여야한다. 쉼표가 있는 자리에서 어중간하게 건반을 누르고 있으면 소리가 지저분해지고, 쉼표가 의도하는 바를 표현하지 못한다. 나는 악보에 그려진 다섯 개의 쉼표마다 손을 건반에서 완전히 들어올리면서 '쉼'을 배웠다. 휴식의 시간을 가질 때는 모든 걱정거리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업무, 잡생각을 내려놓고 제대로 쉬어야한다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필요를.
얼마 전, 제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쉼에 서툰 나의 면모는 짐가방을 싸는 순간부터 드러났다. 나는 여행지에서 보다 더 완벽한 여유를 즐기기 위해 쉬지 않는 편이다. 여유를 위해 쉬지 않는다니. 이 아이러니한 문장이 무슨 의미인가하면, 일상의 자리보단 느리게 흘러가는 여행지의 여유를 즐기기 위한 여러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책을 읽거나 수첩에 글을 끄적이는 것,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여행 노트를 꾸미며 여행지를 기억하는 일처럼 활동적이진 않지만 사부작사부작 무언가를 계속 하는 것이다. 제주로 떠나는 짐가방을 쌀 때도 정적이면서도 분주한 여행을 위한 준비물을 하나 둘 담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읽을 책 한 권, 아직 한 롤을 다 못 쓴 필름 카메라, 떠오른 생각들을 담을 다이어리와 색연필, 일기가 심심하지 않게 꾸밀 스티커와 마스킹 테이프까지. 이것만으로도 짐가방이 묵직해졌다. 이 때, 베토벤 선생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제대로 쉬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볍게 떠나자. 담았던 물건들을 다 비워내고 배낭 하나만 메고 떠나기로 했다. 수화물 찾는 곳을 지나쳐 곧장 공항 문을 나서는 홀가분함이란.
공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이었다. 여전히 직장에 남겨두고 온 일들이 떠올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시 돌아가면 해야할 일들을 미리 생각하며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을 누리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쉼표를 떠올린다. 핸드폰 메모장을 켰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다시 출근을 하는 날 해야할 업무들을 순서대로 쭈욱 써내려갔다. 직장의 일을 배출하듯 써뱉어놓고, 단호하게 생각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여행지에서 일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휴식의 시간과 휴식 후 돌아가야하는 자리의 시간이 겹쳐지면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여행지에서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점심을 먹으며 해야할 설거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 식사 끝낸 후 가지는 잠깐의 커피 타임에 오후에 해야하는 회의를 생각하지 않는 것, 잠자리에 들어 내일 써야할 보고서를 생각하지 않는 것. 쉬고 있는 지금, 여기를 제대로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
나와 닮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쉼표'를 기억하자. 건반에서 손을 완전히 떼야하는 쉼표를. 쉼표가 있음으로 음표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이 돋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 곳곳에 찍는 쉼표들이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나를 위한 쉼표의 시간을 가져보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띄운 채 온전한 쉼표의 시간을 누려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