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과거의 미심쩍은 귀환
지도사항을 전달드립니다. 응? 뭐라고? 입사이래 처음 보는 단어에 적잖이 당황했다. 지도라니? 누가 누구를? 임직원은 서로 수평적인 관계라고 호칭도 변경하지 않았던가? 근데 왜 갑자기 누가 누굴 지도하지? 머릿속에 물음표 살인마가 날뛰고 있었다.
미팅은 누가 누구를 지도하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스승과 제자사이도 아니고 학문적 열의를 가지고 상아탑 아래 연구하는 학자들도 아니다. 기업의 이윤추구라는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또 각자의 생활 영위를 위한 돈벌이의 목적 아래 여기 모여있다. 나름의 직급체계가 정해져 있지만 그건 너와 나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너의 고과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나는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회사에는 그런 짓을 방지할 제도가 마련되어 있고 그걸 감시하는 인사팀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같이 소통하고 협의하며 일해서 시너지를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지시를 받고 따르지 않는다. 이런 문화는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자리잡지 않았던가. 도대체 무엇이 지나간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가.
미팅은 협의를 하는 자리이다. 지도가 필요한 곳은 수업이나 스포츠 클래스다. 회의는 일방향 지도가 아닌 쌍방향 의사소통이 필요한 자리다. 본인이 지도를 할 만큼 자신이 있다면 일타강사를 하면 된다. 착각도 정말 유분수지 이 정도면 선을 넘었다. (이미 넘은 선이 한 두 개는 아니지만)
지도라는 단어를 보면서 문득 유도, 레슬링을 떠올렸다. 이 사람 혹시 회사 생활을 유도랑 착각하고 있는 건가. 어쨌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본인이 모두를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착각. 그래서 저런 단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다는 착각. 메타인지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자신의 위치와 능력에 대한 착각. 착각들은 중첩되고 쌓여서 이곳을 가득 메웠다. 떠다니는 착각들은 다 타버린 재처럼 매캐한 냄새를 뿜으며 흩날린다. 하지만 시커먼 잿가루가 누군가에겐 색색의 꽃가루로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선배라면 후배를 마음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시절. 내키는 대로 후배를 불러내 욕을 하고, 화를 내고, 기합 주고, 불이익을 주던 시절. 난 너보다 먼저 태어났으니까, 너보다 먼저 들어왔으니까, 너보다 직급이 높으니까. 마지막에 너보다 일을 잘하니까라는 게 보태졌다면 차라리 좀 나았으련만 그들은 남들보다 일을 덜 하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부류였다. 그네들이 즐겨 쓰던 단어가 지도다. 그들에겐 지도, 듣는 사람에겐 잔소리. (혹은 개소리) 지도라는 단어 아래 숨어 입만 나불대던 사람들이 이제는 좀 사라졌구나 했는데. 아차,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원래 뭐든지 주고받는 게 좋은 법이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니 나도 지도 하나 하겠다. 한 번쯤은 본인이 지도(라고 착각)하는 영상을 녹화해서 아무도 없을 때 혼자 감상 한 번 해보시라. 가끔은 거울치료가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오늘의 지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