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는 역시 한 잔하고 달려야 제 맛이지
지금 40대 남자라면 인생에 스타크래프트가 빠져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대학시절 한 집 건너 마구잡이로 생겨나던 피씨방을 흥하게 만들었던 게임. 당구장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대학가의 패권을 차지한 게임. 담배연기 자욱한 피씨방 안에서 상스러운 말을 내뱉어가며 밤을 새워봤던 경험이 모두 있으리라. 그 시절 잘하든 못하든 스타크래프트는 일종의 전공 필수과목처럼 꼭 배워야 하는 게임이었다. 당연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손으로 여유롭게 마우스로만 스타를 하던 나에게 피씨방 알바형은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 야, 니가 그래서 안 되는거야. 스타는 두 손으로 하는거야.
큰 깨달음을 얻고 두 손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게되자 승률은 급격히 올라갔다. 이기면 재미있고 재미있으면 더 이기고 싶어진다. 단축키를 외우고 남들이 모르는 걸 알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피씨방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4대4 팀플에 내가 빠지면 섭한 상황이 만들어졌고 나는 승리의 필수카드가 되었다. 그러다 당시에 운영하던 사이트의 정모를 하면서 처음 만난 친구 2명과 피씨방을 간 적이 있었다. 아직 스타를 모른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당장 피씨방을 가자고 했고 그들에게 나의 실력을 마음껏 과시했다. 친구 2명에 컴퓨터를 끼고 1:3으로 하면서도 느긋하게 이길 수 있었다. 나의 뮤탈은 적진을 종횡무진했고 SCV의 일터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뮤탈이 지겨우면 히드라 웨이브도 했다가 무한 저글링을 했다가 전략도 자유자재로 바꿨다. 처참하게 무너지면서도 그들은 나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나는 그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 얘들아. 스타는 두 손으로 하는거야.
정확히 반년 후. 우리 셋은 다시 정모를 가졌다. 그들은 날 이기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며 바로 피씨방 고고를 외쳤다. 그 동안 나도 스타를 쉬지 않았기에 나는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쯤되면 모두 예상하겠지만 결과는 대참패. 뮤탈을 날리면 캐논이 있었고, 저글링이 가면 성큰이 있었고, 히드라를 만들면 발업질럿과 시즈탱크가 나를 반겼다. 내가 대책없이 무대뽀로 빨리 생산하는 것만 반복하고 있는동안 그들은 테크트리라는 것을 배운거였다. 당시 스타리그가 막 흥행하던 시기였고 그들은 프로게이머의 경기들을 보면서 상대방의 전략에 맞춰서 맞춤형 테크트리라는 것을 준비해왔다. 그 앞에 난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게 내 스타 인생의 끝이었다. 무너진 내 자존감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나는 스타로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자존심에 상처받은 나는 그 따위 테크트리 따위 몰라도 이길 수 있어라고 나 자신을 방어했다. 당연하겠지만 그럴 수 없다.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 때부터는 테크트리를 배우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격차는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후자의 대열에서도 밀려나 낙오자가 되었다. 그렇게 재미있던 게임이 이제 지겨워졌다. 나의 새로운 낙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보는 것이 되었다.
그렇게 중단되었던 나의 스타인생이 오늘 다시 시작되었다. 배틀넷 접속하기까지 무려 30분이 걸리고 피씨방 헤드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 음소거로 게임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에 좀 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게임을 했건만 난 같이 게임을 한 모두 중에 가장 못하는 블랙홀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무지 재미있었다는 점이다. 기나긴 세월이 이제 그 얄팍한 자존심은 날려버린건지 지는 것이 더 이상 두렵고 쪽팔리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난 늘 이렇게 회피형 인간처럼 살아왔다. 살다가 막히면 도망갔다. 재능이 없는 편은 아니라서 뭐든지 곧잘 해내곤 했지만 남들을 압도할 만한 재능은 없었다. 어느 정도 하다가 진짜 어려운 단계가 나오면 ‘아, 이제 좀 지겹네’라고 외치며 돌아섰다. 남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말하며 뒤로는 비겁하게 도망쳤다. 도전은 무섭고 비난도 무섭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건 무서워서 피하기만 하다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다. 그렇게 더 이상 피할 데도 없이 몰리다 보면 인생의 막다른 길에 다다르게 된다. 나이 마흔 넘어서 뒤늦은 깨달음이긴 하지만 그런 막다른 길로 내몰리는 것 보다는 무서워도 한 번 부딪혀 보는게 좋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약간의 고통을 지나가면 게임이 다시 재밌어지는 순간이 오니까. 나는 지금 유튜브에 저그 테크트리를 검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