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을 워낙 좋아해서 글쓰기 배경 테마를 모두 보라색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너무나 노랑노랑한 날씨이기 때문이다.
점심 먹고 산책을 하다 보니 햇살이 비친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잠이라도 잘 것처럼 스르륵 눈이 감긴다. 색색깔의 바깥 풍경이 오로지 노란색으로 바뀐다. 하늘이 노랗다고 할 때의 부정적인 노랑이 아니라 따뜻한 에너지를 무한정으로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아늑한 노랑. 오늘의 날씨는 노랑이다.
눈을 감고 걸어본다. 하나, 둘, 셋. 넘어질까봐 무서워 자꾸 눈이 떠진다. 다시.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렇게 한 걸음씩 더 걸어본다. 움직이는 내 몸이 따뜻한 노랑 속을 걷고 있다. 무수한 노랑이 떠다니지만 단 하나의 노랑만이 나에게 들어온다. 눈을 뜨고 심호흡을 한다. 다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몇 번을 해 봐도 여덟 발자국을 넘길 수가 없다. 넘어지는 게 이토록 두려웠던가. 넘어져도 세상 모든 것이 따뜻하게 날 감싸줄 것만 같은 이런 날씨에도 두려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좋다. 몸은 말랑해지고 기분은 나른해진다. 이전의 세상과 눈 감고 걸은 뒤의 세상은 조금 다르다. 그저 눈을 감고 걸었을 뿐인데 이제야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눈을 감고 열 발자국. 지금부터 시작될 봄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시도할 것이다. 눈을 감고 열 발자국.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