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심일일

눈을 감고 열 발자국

by 현진형

보라색을 워낙 좋아해서 글쓰기 배경 테마를 모두 보라색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다. 너무나 노랑노랑한 날씨이기 때문이다.


점심 먹고 산책을 하다 보니 햇살이 비친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잠이라도 잘 것처럼 스르륵 눈이 감긴다. 색색깔의 바깥 풍경이 오로지 노란색으로 바뀐다. 하늘이 노랗다고 할 때의 부정적인 노랑이 아니라 따뜻한 에너지를 무한정으로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아늑한 노랑. 오늘의 날씨는 노랑이다.


눈을 감고 걸어본다. 하나, 둘, 셋. 넘어질까봐 무서워 자꾸 눈이 떠진다. 다시.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렇게 한 걸음씩 더 걸어본다. 움직이는 내 몸이 따뜻한 노랑 속을 걷고 있다. 무수한 노랑이 떠다니지만 단 하나의 노랑만이 나에게 들어온다. 눈을 뜨고 심호흡을 한다. 다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몇 번을 해 봐도 여덟 발자국을 넘길 수가 없다. 넘어지는 게 이토록 두려웠던가. 넘어져도 세상 모든 것이 따뜻하게 날 감싸줄 것만 같은 이런 날씨에도 두려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좋다. 몸은 말랑해지고 기분은 나른해진다. 이전의 세상과 눈 감고 걸은 뒤의 세상은 조금 다르다. 그저 눈을 감고 걸었을 뿐인데 이제야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눈을 감고 열 발자국. 지금부터 시작될 봄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시도할 것이다. 눈을 감고 열 발자국.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한 날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스타크래프트와 자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