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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Nov 13. 2019

마음만으로 문학할 수는 없겠지만

<문학하는 마음>을 읽고

<문학하는 마음>, 김필균 인터뷰 집, 제철소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했다고 하면 으레 '혹시 소설이나 시를 쓰냐'라고 물어오거나 '국문학과니까 글쓰기를 잘하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러나 국어국문학을 선택한 이유는 으레 그렇듯이 성적에 맞춰서 원서를 냈는데 받아준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경영이나 경제 등 상경계열로는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았으며 사학과는 잘 모르고 어문 쪽으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막연하게 철학이나 국문학 정도면 괜찮겠지 싶었고, 지방이 아닌 서울 소재의 대학을 가고 싶어 무턱대고 상향지원을 했다. 대기번호를 받았고 며칠이 지나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막상 대학에 들어왔을 때,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전공의 실체를 깨닫고 경악했다. 언어학과 문학 어느 쪽이든 낯설기 그지없었다. 입학하고서 2년이 넘도록 전공 수업을 피해 다니다, 결국에는 군대로 향했다. 전역 후에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얌전히 전공 수업을 수강했다. 졸업은 해야 했으니까.




국어국문학과의 인연은 우연이었으나, 문학에 대한 동경은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등단한 소설가가 되겠다는 식의 거창한 목표는 아니었다. 내 손으로 쓴 작품이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나와서 독자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면 좋을까, 하는 막연한 동경 정도.


초등학교 때부터 쭉 소설을 써왔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 내가 쓴 글을 재미있게 봐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글쓰기에 재주는 없었던 모양이다. 인상 깊게 봤던 작품을 따라 하는, 소위 팬픽을 쓰는 것에 그치고 말았으니. 백일장이나 대회에서 상을 받아본 적도 없다.


그럴수록 자의식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져서, 나만의 작품을 내놓고 싶다는 욕심도 강했다. 그탓에 남이 쓴 글과 책을 피하게 되었고, 고전 명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작품을 읽었다가는 '나'를 잃고 영향을 받을 것이 불 보듯 뻔하므로. 대학에 들어와서 글을 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등단에 대한 이중적 시선도 그때 생겼다. 제도권 문학의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관계로, 나의 허술한 상상력과 빈약한 문체 따위의 문제와 정면 승부하기보다 실체조차 불분명한 카르텔을 의심했었다. 한국 문학계는 글렀다는 둥, 재미가 없다는 둥. 좁은 세계에 갇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믿었다.


군대를 다녀왔던 경험은 많은 걸 바꿔놓았는데, 그것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랬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때 달라졌다. 자신의 영역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함부로 힐난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나는 결코 그들이 될 수 없으며, 어쩌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들을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내가 문학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괜히 문학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대체 무엇이 나를 붙잡아 두고 있는가 싶다가도, 불현듯이 깨닫고는 한다. 여전히 나는 무언가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분출의 욕망. 세상을 바꾸어놓고 싶다는, 거창하기 그지없는 야망. 내가 쓴 것을 읽고 누군가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으면 한다. 다른 이가 어떻게 문학에 발을 들여놓는지는 모르겠으나,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그럴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 능력을 탓하며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점 매대에 진열된 <문학하는 마음>을 집어 들었을 때 질시와 원망이 조금쯤은 섞여있었는지도. 그 마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 번 봅시다. 그렇게 기세 좋게 사놓고는 한참을 까먹고 있었다.


여행을 가게 돼서야 비로소 <문학하는 마음>을 집어 든 건, 글쎄, 1년 가까이 지속되는 구직 생활, 아니지, 백수생활 동안 자꾸만 꿈틀거리는 '문학'에의 욕망 때문이었으려나. 쓸모없는 일을 하느니 한시바삐 직장을 가져야지 싶다가도 시선이 엉뚱한 곳에 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문학하는 마음>은 다년간 문학 편집자로 일해온 저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문학을 하고 있는 11명과 진행한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단순히 인터뷰를 수록했다기보다는, 문학의 가장 지척에 서있었던 저자의 시선도 엿보인다. 너무 진지하기보다는, 진솔한 태도가 좋았다.


인터뷰이 11명 모두 신선하다. 그림책 작가, 청소년 문학 작가, 시인, 소설가, 극작가, 에세이스트, 웹소설 작가, 문학 평론가, 서평가, 문학잡지 편집자, 문학 기자. 문학을 한다고 했을 때 떠올릴 수 있을 만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대담자를 선정했다는 게 한눈에 드러난다.


돈도 되지 않고, 사는 게 팍팍해도 어쨌거나 문학을 하고 있는 이들이 지닌 각자의 관점과 태도. 한 마디로 채 요약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문학을 하는 것은 인터뷰집의 제목대로 문학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좋았던 건 박준 시인, 신형철 평론가, 최은영 소설가, 정여울 에세이스트의 인터뷰였다. 이들 각자가 처한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그들의 삶을 지탱해온 것이 문학이었음이 느껴졌다. 더욱이 등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때 소설가 비슷한 것이 되길 원했던 나에게도 와 닿았다.


지속 가능한 글쓰기를 위해서는 세상에 내보일 창구가 필요하며, 문학잡지와 등단 제도가 그런 역할을 일임해야 한다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나, 등단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며 다시 등단을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는 최은영 소설가의 고백은 빈말이더라도 반가웠다.


소설은 아니더라도 글을 쓰면서 좀 더 많이 읽히고 싶고 알려졌으면 싶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웹상에 글을 써서 올리는 이유도 결국에는 '읽히고 싶으니까'였다. 등단을 하고 프로가 된다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읽힌다는 건' 의미가 남다르다.




박준 시인의 인터뷰는 직업인과 시인 사이에서 자신의 시가 지닌 장점과 한계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삶 속에서 문학하는 사람의 태도가 돋보인다. 5년 동안 천 편 넘게 시를 쓴 것도 경이롭지만, 그가 평범한 삶에서 건져내는 문학적 감수성은 보편적이면서도 고유한 빛깔이 넘쳐난다.


박준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좋게 읽었던 입장에서, 그의 인터뷰를 통해 또 한 번 시인의 진정성을 느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또한 여성이자 학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꾸준히 글을 써나갈 것이라는 정여울 에세이스트의 말은 이제까지 써왔으며 지금도 쓰고 있고, 앞으로도 써나갈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강함이 느껴진다. 


언젠가는 소설 같은 글을 쓰고 싶다며, 온전히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고백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렇다. 글을 쓴다면 '내'가 아니면 누구도 쓸 수 없는 글을 쓰고 싶다는 게 글 쓰는 이의 심정일 것이다. 그래서 정여울 에세이스트의 그러한 바람은 결코 과장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 네 명 외에도, 그림책 작가 서현, 청소년 문학 작가 김혜정, 극작가 고재귀, 웹소설 작가 윤이수, 서평가 금정연, 문학잡지 편집자 서효인, 문학 기자 김슬기의 인터뷰 모두 '문학하는 마음'에 대한 은근하지만 강한 호소가 담겨있다.


또한 인터뷰집의 외피를 감싸고 있는 저자 김필균의 시선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문에서부터 '문학병'을 언급하며 솔직하게 '문학하는 마음'에 대해 말해오는 태도가 인터뷰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문학과 마음 모두 진심을 내비치지 않으면 불가능하니까.


제아무리 문학이 위대한 일이라 할지라도, 먹고사는 일과 별개일 수 없으며 그 지긋지긋한 생존의 문제와 결부되었을 때 더욱더 문학을 절실하게 추구하게 되는 역설에서 문학하는 마음이 가장 강하게 피어나는 것인지도. 그렇다고 생존의 절박함을 아름답게만 포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와 인터뷰이 11명 모두 이를 알고 있기에, 인터뷰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먹고사는' 문제다. 문학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럼에도, 그 문제에 함몰되지 않는 꿋꿋함이 드러난다. '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문학하고, 쓴다.




<문학하는 마음>을 읽고 있는 내내, 머릿속에는 저자와 인터뷰이를 양옆에 두고 그 사이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이들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뭐라도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은, 자꾸만 튀어나오는 표현의 욕구를 억누르고 있느라 애를 먹었다.


뭐라도 당장 써야 할 것 같은 기분. 그러나 그 기분은 말그대로 '기분'에 불과해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모니터 앞에 앉아 서평 아닌 서평을 쓴다. 이상한 기분이다. 감상을 쓰고 나면 나아질 줄 알았더니 여전히 휑한 느낌이다.


아마도 계속해서 써야만 이 마음이 충족되지 싶다. 문학하는 마음 그에 따라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행위다. 마음이 있다면 그에 따라 행동으로 옮겨야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비록 인터뷰이 11명처럼 아주 대단한 것을 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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