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있는 인생>을 읽고
생판 남과 만나는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건 그 자체로 난감한 일이지만, 취미나 특기를 말해야 할 때는 괜히 더 민망한 기분이 든다. 독서나 영화 감상 같이 특별히 표 나지 않은 일을 적당히 주워섬기며 이번에도 곤란한 상황을 잘 넘겼다며 안도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취미라고 하려면 뭔가 대단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만의 취미'라고 하려거든 특별한 것이 필요해 보인다. 독서라면 1년에 100권쯤 읽는다든지, 영화 감상의 경우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영화관에 간다든지. 그래야만 이것이 나의 취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것이 나의 취미입니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하게 보인다. 소설가이며 이 책의 저자 마루야마 겐지도 그런 사람이다. 영화와 낚시, 운전 등 흔해빠진 취미를 '자신의 취미'로 말할 수 있는 강함이 느껴진다. 하긴, 이 사람의 또 다른 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부터 범상치 않긴 했다.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가다. 그의 작품 중 내가 읽어본 것은 데뷔작인 <여름의 흐름> 뿐이라서 소설가로서 마루야마 겐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다. 취향에 맞지 않아서 다른 작품은 찾아 읽지 않았다. 겐지가 쓴 에세이는 꽤나 재미있게 읽었는데, 단호하고 때로는 완고하기까지 한 문체가 매력적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그리고 <소설가의 각오> 이렇게 두 권이었는데 겐지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너무 강직해서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강한 표현을 써야 하나 싶은 정도다. 타협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취미 있는 인생>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마루야마 겐지 하면 소설에만 몰두해 있을 것 같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봐란듯이 다채로운 영역에의 관심을 보여준다. 낚시, 영화, 음악, 운전.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상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소회들. 마루야마 겐지가 어떤 인간인지 보다 또렷하게 보인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만났을 때 굳이 취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취미만큼 사람을 잘 드러내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흔한 취미로는 도대체 알 수 있는 게 없다. 특이한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첫인상이 어떠하였든 이전과는 달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다 못해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든가, 마라톤을 즐긴다든가, 무언가 뚜렷한 취미를 지닌 사람에게는 삶의 중심이 잡혀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취미에만 몰두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취미는 인생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곤란하다.
최근 쌍안경을 가지고 야산을 돌아다니는 사람과 자주 맞닥뜨리게 되었다.(중략) 그런데 그들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왠지 나는 '기분 나쁜' 느낌을 받는다. (중략) 그들의 그런 열정 뒤에 있는 뭔가를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나 나비를 정신없이 뒤쫓는 이외의 시간, 일이나 가정과 같은 현실의 어떻게 보낼지 상상하고 거기에서 풍기는 도피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까. ( <취미 있는 인생> 중 p33)
겐지 또한 취미를 '도피'따위로 여겨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취미라고 하면 일단 취미일 뿐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있는 힘껏 즐기려고 할 뿐이다. 낚시를 하면 시간을 들였으니 반드시 무언가 낚아야 하고, 영화도 자신의 취향에 부합해야만 한다.
그래서인지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읽다 보면, 이렇게 꽉 막힌 아저씨가 다 있나 싶은 순간이 있다. 요즘 말로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다. 그러나 이 꼰대는 자신의 말을 지키려 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보여주며 책임져야 할 때 제대로 질 줄 안다. 참된 꼰대라고 해야 할까?
마루야마 겐지의 글과 문장에는 '유약함에 대한 환멸' 같은 게 묻어난다. '어른'이라고 하려면 부모로부터 자립해야 하고, '소설가'라면 소설로 말해야 한다는 게 겐지의 지론이다. 변명이나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는 태도에 대해 지긋지긋함을 넘어서, 분노마저 표출한다.
소설가로서의 태도가 가장 잘 묻어 나오는 대목은, 소각로를 만드는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겐지는 자신의 편집자에게 '어설픈 태도로 일을 맡지 말아 달라'며 완강하게 말한다. 소설가와 편집자는 각자 맡은 일이 있어서 만날 뿐이며, 자신의 소설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해달라며(같은 책, 61p)
문학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좋다거나, 직장이라서 다닌다는 태도로는 곤란하다고, 마치 꾸짖듯이 말한다. 어떤 면에서 기분 나쁘기까지 하다.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그에 대한 책임으로 일하는 게 뭐가 나쁘다고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싶다가도 일견 수긍하게 된다. 그런 '어설픈' 태도로는 분명 곤란하다.
자신의 일에 전신전령을 다 한다. 마루야마 겐지는 그런 사람이다. '이쯤이면 되겠지'하는 어설픈 태도로는 쉬이 납득하지 못한다. 자신만의 기준이 턱도 없이 높은 건 아니지만, 그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면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겐지의 글을 읽다 보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한 기분이 든다.
영화나 음악, 그리고 사람과 인생을 바라보는 마루야마 겐지의 태도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왠지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겐지의 글에서 피로감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고 본다. '남자'라면 어떠해야 한다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발언도 있다.
그럼에도 겐지의 글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온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가지는 '강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마루야마 겐지도 인간이기에 그가 지닌 모든 관점이 옳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강함에 이렇다 저렇다 변명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 답답하기까지 한 완고함을 어디까지 지켜나갈 수 있나 괜히 지켜보고 싶다. 적어도 이 사람은 변명따위 하지 않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잘못을 수용할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마루야마 겐지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겐지는 그런 사람이므로. 아마 필요하다면 수용도 하겠지. 자기 방식으로.
아니, 그런 기대조차 하지 말라고 마루야마 겐지라면 말할 것 같다. 자기는 그저 자기답게 살 뿐, 어떤 인상을 덧대는 건 타인의 욕심일 뿐이다. 마루야마 겐지라는 사람을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한 번쯤 그의 글을 읽어보기를. '자기 몸으로 살아낸다'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