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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Apr 09. 2023

내일로 가는 문 -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감상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 그리고 <스즈메의 문단속>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은 감독 신카이 마코토가 전작 <날씨의 아이> 이후 3년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그의 작화나 연출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글 서두에 밝혔듯이 어떤 후기글에서 <날씨의 아이>와 큰 차이가 없다는 혹평 아닌 혹평을 보고 관심이 식었던 차였다. 그러나 누군가 내린 평가로 영화를 판단할 바에는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고, 곧장 영화관을 찾아갔다.


나에게 있어 신카이 마코토는 <초속 5센티미터>와 <별을 쫓는 아이>까지만 해도 크게 인상 깊은 감독은 아니었다. 언어의 정원은 개봉 당시 빗방울이 들이치는 정원과 빗방울의 연출이 대단하다고 느껴졌지만 극장으로까지 찾아가서 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너의 이름은>부터 감독이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다는 걸 느꼈고 <날씨의 아이>에 이르러서는 무척 감격하며 봤던 기억이 있다.


번에 상영한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러서 관객들에게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가 또 한 번 진보했음을 느꼈다. 누군가는 <너의 이름은>의 대중적인 성공 이후로 비슷한 메시지를 변주해오는 게으름이나 답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다. 신카이 마코토는 전작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던 바를 비슷해 보일 뿐인 방식으로 더욱 발전했고 보다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영화 초반부터 범상치 않더니 영화 중반부터는 눈물이 나오는 걸 참아가며 감상하다가 막바지엔 기어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왜 사람들이 인물의 반응이 너무 극단적이라는지, 전작과 차이가 없다는지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영화가 그렇듯, 누군가의 감상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다. 그들이 틀렸다는 말도 아니지만, 내가 그 영화에 대해 어떤 감상을 내리려면 직접 봐야한다.


말하면 입만 아픈 너무 당연한 소리지만 요즘엔 영화를 보지도 않고 타인이 내린 평가에 너무 쉽게 휘둘리지는 않나 싶다. 여하튼 나에게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지난 어떤 작품들보다 가장 훌륭했다. 그리고 어째서 훌륭하다고 말했는지 다루어보려고 한다.


줄거리 요약

평범했던 고등학생 이와토 스즈메. 그녀는 폐허를 찾아 떠도는 대학생 미나카타 소타를 만나게 된다. 운명에 이끌리듯 소타를 뒤쫓던 스즈메는 폐허 속에 세워진 낡은 문을 마주하게 되고, 문 너머에 펼쳐진 신비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언젠가 기억 속에서 본듯한 풍경. 스즈메는 몇 번이나 통과하기를 반복하지만, 문 너머의 세계에 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발걸음을 돌려 학교로 돌아가려던 중, 스즈메는 문 근처에 놓여있던 정체불명의 돌을 뽑아들게 된다. 돌이 고양이의 모습을 한 채로 사라지자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망치듯 스즈메는 그 자리를 벗어난다. 학교로 돌아온 사이, 스즈메는 본인이 있었던 폐허에서 괴상한 형체를 한 무언가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친구들 중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스즈메는 무작정 다시 한 번 폐허로 향하게 된다.


문을 통해 무언가 빠져나오는 걸 안간힘을 쓰며 막아내고 있는 소타, 스즈메는 소타를 도와 문을 닫는데 성공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겪였던 괴현상의 명칭은 '미미즈'로, 현실이 아닌 문 너머에서 빠져나와 지진을 일으키는 괴현상이었다. 소타는 이를 막기 위해 전국을 떠돌던 중이었고, 둘의 인연도 이렇게 끝나는 것 같았으나 정체불명의 고양이 '다이진'이 나타나 소타를 의자로 바꾸어버린다.


고양이 '다이진'의 뒤를 쫓아 집을 나서게 된 스즈메와 소타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의자. 급작스럽게 시작된 둘의 여행, 그 끝에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야기로서의 발전

<스즈메의 문단속>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감독의 지난 작품을 먼저 이야기해야될 것 같다. <너의 이름은>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라기보다는 몇 화짜리 애니메이션이 짜깁기되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사이사이 들어간 RADWIMPS의 노래가 삽입된 장면들이 그런 인상을 부추겼는데 <날씨의 아이>에서도 어느정도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본격적인 전개에 앞서 인물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전개가 너무 늘어지지 않게 완급조절을 시도한 연출이었겠지만, 극에 집중할 즈음이면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런 장면들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러서 그런 부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데 감독이 이야기꾼으로서 한층 더 진일보했음이 느껴졌다.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안에서 주변부로 빠지는 일 없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아마도 이전 작품이라면 두 사람의 만남 이후 다이진을 쫓는 과정은 RADWIMPS의 노래와 함께 빠르게 묘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일상의 풍경을 빠르게 생략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지역에서 문을 닫는 과정을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인물들과 엮어서 묘사함으로써 어째서 문을 닫는 일이 중요한지, 그리고 스즈메에게도 이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전개가 끊기지 않는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다이진의 역할도 큰데, 사건이 마무리될 즈음에 모습을 드러내 그 족적을 쫓아가게끔 만든다. 요석인 다이진을 다시 돌려놓아야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설명으로 인해 스즈메와 소타가 다이진을 쫓는 이유도 납득 가능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 과정이 지나치게 유기적이어서, 인물의 감정선이 과장되었다거나 전개가 작위적이라는 평이 나오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남자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쫓아가는 스즈메와, 스즈메에게 너무나 호의적인 주변인물들은 언뜻 보기에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작에 해당하는 스즈메와 소타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떤 운명적인 끌림이 있음을 묘사하고 있으며 결말에서 그 단서를 제공해주면서 나름대로의 매듭을 지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묘사

주변인물들이 보이는 선의는 단순하게 인과관계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의식과 이어진다는 측면에서 피해자들의 연대는 논리적인 이유나 설명이 아닌 연대와 공감의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스즈메와 그녀가 만난 인물들의 관계를 감히 피해자들의 연대라고 말하는 까닭은 대사와 묘사를 통해 과거를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즈메가 고향을 떠난 후 처음 만나게 된 동년배인 아마베 치카는 다니던 학교를 지진을 통해 잃었고, 새롭게 생활 터전을 꾸려나가고 있다. 고베에서 만나게 된 루미는 두 자식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그녀가 남편과 떨어지게 된 계기는 묘사되지 않지만,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그들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함께 생활하는 과정은 전체 사건과는 크게 상관없어 보이지만, 그 지역의 문을 반드시 닫아야만 하는 이유를 제공해준다.


소타가 해왔던 일, 그리고 지금 스즈메가 하는 일은 곧 이들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전혀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속 다른 사람들 -영화를 보기 전인 우리들과 마찬가지인- 에게 스즈메는 그저 가출 소녀이거나 헤진 옷을 입고 다닐 뿐인 이상한 소녀일 뿐이다. 이에 대조되는 치카와 루미가 보여주었던 따스한 시선은 소타와 스즈메가 하는 일이 남들에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걸 드러내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영화 전개의 이음새 역할을 맡아주고 있다.


여전히 재난이 벌어지는 지금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가장 특징적인 소재를 꼽으라면 바로 '문'이다. 영화의 이름에서도 암시되지만, 문 너머에서 현실로 틈입해오는 재해 '미미즈'를 막아내기 위해 일본 전국을 떠도는 게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이를 통해서 관객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재난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언제 어디서든 벌어진다는 점이다


하필 그 재난이 찾아오는 장소가 더이상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폐허라는 건 2가지 측면에서 다루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재해가 발생하는 원인인 문부터 이미 모종의 이유로 인해 폐허가 된 곳에만 있다는 것과, 두 번재로 그곳을 관리하지 않으면 우리 삶의 터전 역시 폐허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어떤 형태로 그 장소가 폐허가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재난들이 있고, 또다시 반복될 재난을 막아내기 위해 그 땅과 시설에 서려있는 기억들을 통해 문을 봉인할 뿐이다. 어째서 문단속인가 고민해볼 수 있다. 우리가 문을 닫아두는 이유는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다. 굳이 돌아가지 않을 곳의 문을 닫아둘 필요는 없다. 그러나 원치 않는 손님이 찾아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재해인 미미즈는 원치 않는 손님이다. 어째서 미미즈가 찾아오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원치 않은 재해가 우리의 일상에 들어오지 않게끔 문을 닫아둘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문 너머로 나아가라면 닫아두어야 한다. 언젠가 돌아오기 위해서.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문'은 바로 스즈메가 어머니를 잃었던 재난이 벌어진 곳이다. 영화는 고향을 떠난 인물이 여행의 끝에 도착한 곳이 자신의 집이었다는 귀환의 서사를 통해 인물의 성장과 회복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잊지 않을 것, 받아들일 것.

스즈메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고 무척 건강할 뿐이지만 어린 나이에 소중한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실감, 그리고 이모의 청춘을 갉아먹었다는 부채감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가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계기는 소타와의 만남을 통해 '문'을 닫게 되면서부터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봐서는 전혀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각자의 문제를 껴안은 채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서 그녀는 자신 안의 상처와 만나게 된다. 그들이 스즈메에게 보내는 손길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한 셈이다. 네가 하는 일은 의미 있다고, 우리는 그런 너를 응원한다고.


대학생 소타 또한 전국을 떠돌며 재해를 막고다니는, 토지시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는다. 그의 친구조차도 모르지만 오직 스즈메만이 소타를 알아본다. 재해가 일어났던 사실조차 무심하게 잊고 지내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재해를 기억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 또한 피해자들이다.


소타가 의자로 변하게 된 이유도 '잊고 지낸다'는 은유의 연장이다. 우리는 의자에게 고마워하지 않는다. 의자는 인격체가 아닌 사물이니까 감사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그 의자가 한쪽 다리가 없는 제기능을 상실한 의지임에도 의자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더라도 의자이기에 신기할 뿐이지 어떤 감상도 느끼지 않는다. 소타가 고양이 '다이젠'을 대신하여 미미즈를 막기 위한 요석이 되는 시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도구로서의 쓰임새로 더이상 뛰지도 말하지도 못한채 영원히 한 장소에 틀어박히는 것이다.


이는 <날씨의 아이>와도 이어지는데, 누군가의 희생 하나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희생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 계산이 정답이어선 안 된다고 감독은 반복해서 주장한다. 누군가가 희생하며 이전과 똑같이 나아가는 게 아니라, 다른 대답을 찾아보자고. 그리고 잊지 않고 기억하자면서. 스즈메는 자신이 어머니를 무척이나 좋아했음을 그리고 결국엔 그녀를 잃었음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이는 것과 잊는 것은 다르다.


상처와 마주하는 일.

상처를 받아들이는 일은 무척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강요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스스로가 받아들이자고 결심할 때에만 의미있는 일이다. 그래서 영화 역시 스즈메가 자신도 모르게 떠나왔던 집으로 돌아가는 구조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당히 스즈메는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기로 한다. 스즈메는 폐허의 문들들 닫아왔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이 닫아두었던 문을 열어젖힘으로써 소타를 구한다.


영화 속에서 폐허의 문을 닫기 위한 방법이 그곳에서 살았던 이들을 기억하는 일이듯이, 반드시 문을 닫는다는 게 기억 속에 묻어두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은 언제든 다시 열릴 수 있고, 그렇기에 기억하고 또 되새겨야 한다. 재난과 재해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기억은 기록과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소타가 맡은 역할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소타처럼 특수한 역할을 지닌 이들에게만 그 책임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 소타 역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스즈메와의 만남으로 소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싶다는 걸 깨닫지 않던가. 누군가에게 맡겨 놓은 채 그 희생 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편리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스즈메의 상처를 마주하러 가는 길에 스즈메의 이모는 물론 소타의 친구가 함께했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있는 모두가 함께 해야만 한다. 다같이 오픈카를 타고 스즈메의 고향으로 향하는 풍경은 여느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로드무비처럼 평화롭기도 하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의 이면에는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 항상 잠재해 있다. 서로 가까운 이들임에도 정작 서로 마음 속에 품은 일들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편함이 함께하고 있다. 긴장감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또다른 다이진이 등장하면서 이모의 본심을 자극하는 장면이다.


저마다의 역할

재난 이후의 삶을 살아내는 건 오롯이 피해자나 책임지는 이들의 몫만은 아니다. 스즈메의 이모, 타마키와 그리고 소타의 친구 세리자와로 대표되는 주변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타마키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듯이 자신의 청춘을 바쳐 스즈메의 삶을 책임진다. 그녀가 자신의 지난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는 양가적인 감정이 섞여있다. 스즈메를 책임을 지겠다고 내뱉기는 했지만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야 말았다는 억울함. 그럼에도 그 억울함만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스즈메를 향한 사랑.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두 가지 측면은 단순히 흑과 백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건 한쪽이다. 그리고 둘 중 하나만 진실인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가 곧 진실이기에 사람의 본심은 알기 어려운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두 가지 모두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쪽을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다. 타마키는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 그래서 영화 막바지에 그녀가 어떻게든 낡은 자전거 뒷자리에 스즈메를 태우고 가는 장면은 눈물겹다.


또한 겉멋 든 청년처럼 보이지만 끝까지 스즈메의 여정에 함께한 세리자와도 타마키와 마찬가지로 소타가 해오던 일은 알지 못하지만 그의 옆을 지켜주면서 스즈메가 무사히 고향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아무 말 없이 도와준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더라도 그게 자신의 친구 소타를 위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스즈메에겐 자신의 선택만이 남았고, 스즈메는 소타를 희생하느니 자신이 희생되겠다고 말한다. 그 순간, 다이진은 그런 스즈메를 돕기 위해 다시 요석으로 돌아간다. 모든 사건의 원흉인 줄 알았던 다이진의 행적도 그 순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다이진은 다음 문이 열릴 곳을 알려주었을 뿐이며, 소타를 의자로 바꾼 일도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문을 막으려면 요석이 필요하고 자신은 요석이 되고 싶지 않으니 토지시인 소타를 요석이 될 수 있게 안배한 것인 셈이다.


다이진이 다시 한 번 요석으로 돌아간 이유는 다소 감상적이지만, 그것이 스즈메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스즈메를 위해서 다시 한 번 힘을 보태고 다이진은 사라진다. 만약 다이진도 실제론 사람이었다면 누군가의 희생이 되물림되어온 자리가 아니었을지 추측해볼 수 있겠다. 그런 희생의 연쇄를 끊고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준 건 어쩌면 스즈메의 존재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다.


마침내 도달한 내일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지난 작품들에서 재난을 대하는 방식은 과거와 현재라는 키워드로 요약해볼 수 있다.


<너의 이름은>은 타키와 미츠하 두 사람이 시간 여행이라는 마법적인 수단을 활용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3년이라는 시간차를 뛰어넘어 초자연적인 재해의 한복판으로 돌아가 희생자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내고야 마는 극적 전개의 바탕에는, 스크린 밖에서 일어난 비극-동일본 대지진-을 이렇게라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좋겠다는 감독의 바람이 깔려있는 듯 하다. 서사의 중심축과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 모두 과거에 머물러 있고, 그렇기에 <너의 이름은>은 과거라는 키워드로 엮어낼 수 있다.


<날씨의 아이>는 미증유의 재난을 앞둔 현재를 다루고 있다. 이상기후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중심 사건으로 활용되며 그 원인이 과학으로 해명되지 않은 세계의 의지라는 점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 장르영화의 문법을 띄고 있다. 그러나 이변을 해결할 방법 그 자체와, 이를 둘러싼 선택을 통해서 작품의 시점을 지금 현재로 옮겨놓으며 <너의 이름은>과는 차이를 보인다. 감독은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잊은 채 살아갈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갈 이들에게 그 선택을 맡기자고 말하는 듯하다.


선택을 내리는 주체는 어른이 아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호다카와 히나와 같은 어린아이들이다. 히나 한 명만 산제물로 바친다면 모두가 평소와 같은 일상을 살아갈 수 있지만, 그 행복은 재난 자체를 잊음으로써 만들어진 행복일 뿐이다. 그러나 히다카는 그런 행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록 눈앞에 펼쳐질 현재가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갈 지금 이 순간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날씨의 아이>는 현재로 묶어낼 수 있다.


이번 작품 <스즈메의 문단속>에 이르러, 감독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극중에서 스즈메는 과거의 자신과 만나 '나는 너의 내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감독은 과거와 현재를 지나 이제 내일에 도달했다. 우리가 살아갈 내일. 분명히 더 나을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래서 이 영화가 그토록 감동적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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