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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Jan 01. 2023

사랑의 빈 자리

<헤어질 결심> 리뷰

'헤어질 결심'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는, 뻔한 소리 같겠지만 직접 영화를 보고 난 이후라야 '헤어질 결심'이 진실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방점이 찍혀야할 부분은 사랑이겠으나, 동시에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늘어놓는 사랑에 대한 여러 속설들이 '사랑'의 일부를 포착하고 있다고 해도, 그저 속설에 불과한 이유는 그것이 사랑에 대한 단일한 견해만을 담고 있어서다. 제아무리 그것이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니다. 속설은 사랑의 한 부분만을 지독하게 강조하여 전달할 뿐,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는 여느 속설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무엇이 사랑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서로 상충하는 사랑의 면면을 그 속에 겹쳐놓고, 불투명하고 불분명한 이미지로 내어놓을 뿐이다. 어긋나고 위태로운 모습이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왜인지 사랑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든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헤어질 결심'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만 읽으시는 걸 권장합니다.


불륜, 너머

영화의 외연만 놓고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불륜'이다. 늙은 남편을 사고로 잃은 젊고 아름다운 중국인 과부 '서래(탕웨이)'와, 평일엔 사건을 좇느라 여념이 없고 주말 부부의 삶을 살고 있는 멀끔한 남자 형사 '해준(박해일)'. 이렇게 두 사람을 이어놓으면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불륜'이라는 단어부터 머릿속에 떠오른다.


지금의 배우자와 문제 없이 만나고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운명적인 사랑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이성을 붙잡고 신의를 지킬 것인지, 비난을 감수하고운명에 따를 것인지를 두고 그 사이에서 갈팔질팡하는 인물을 두고보는 일도 충분히 흥미진진한 일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을 고민할 법한, 가능성의 영역을 다루기에 더더욱.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서래의 전 남편인 '기도수'의 사망으로부터 시작된다. 담당하고 있던 사건이 채 마무리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시작된 둘의 관계는 단순 사고로 마무리하기에는 해준 그리고 서래 모두에게 너무나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많은 경우, 현실에서도 사소한 줄 알았던 일에서 중대한 사건이 시작되지 않던가.


영화 속 두 사람은 불륜-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관계-로 발전하는데, '헤어질 결심'은 가십거리로서의 불륜에 그치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재정의하며 관계의 의미성을 자각하는, '관계'의 본질 그 자체에 대해서 다룬다.


붕괴, 고백보다 더 깊은.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사건의 진상이 빠짐없이 드러난 것 같은 순간, 상황은 급격하게 반전된다. 은연 중에 느꼈을 관객들의 불안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서래'는 기도수 사망사건의 진범이었던 것.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해준은 놀랍게도 기도수의 죽음을 사고사로 종결시키고야 만다.


해준에게 형사로서의 자부심은 고작해야 직업 윤리가 아닌, 삶의 이유이자 품위의 바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해준은 이를 포기하고야 만다. 스스로의 자부심을 포기한 순간에야 비로소 해준의 행동과 말은 구체성을 띈다. 그동안 해준은 서래에게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서래가 그 감정의 진위를 비로소 깨닫는 시점은 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고백을 듣고 나서다.

너로 인해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고야 말았다. 내 본질을 부정하는 선택을 스스로 내리는 것. 마치 사형선고와 같다. 그 어떤 좋아한다는 고백보다도 더 절절한 한 마디다. 그러나 해준은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음을 깨닫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아내 정안이 머물고 있는 이포로 떠난다.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서래만이 그 진심을 깨닫는다. 그렇구나. 나는 사랑하는 이를 이렇게 떠나보냈구나. 그때 서래의 사랑이 시작된다.


복잡하지만 분명한.

끝날 것 같았던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공교롭게도 이포에서 또 한 번 시작된다. 영화를 보는 이들 모두가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겠으나, 또 한 번의 살인과 이어지는 전개를 보면서 그저 감탄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산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바다로 이어지고 앞의 살인과 뒤의 살인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진다.


영화 초반에 해준이 살인범을 쫓는 과정조차 앞으로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 대해 많은 걸 시사한다. 여자들은 왜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지, 그 뻔하디 뻔한 질문이 이렇게까지 신선하게 다가올 줄이야. 어쩌면 살인범이 여자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 선택한 순간부터 서래와 해준의 관계가 맞이할 결말은 암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잔인한 방법으로 그것이 이루어 질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영화가 지닌 아름다움은 전체와 부분이 군데군데 얽혀있는 복잡성에 있지만, 조금도 난삽하게 보이지 않는다. 서사 구조의 내부에 있는 것은 너무나 명쾌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개입하는 순간이 자주 있을테지만, 사랑 앞에 놓여 안절부절하는 인간의 모습을 마주하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 이럴 수밖에 없었구나. 영화는 이내 미결을 향해 달려간다.


미결로서의 사랑.

결말에 이르러 해변가에서 애타게 서래를 찾아헤매는 해준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 없다. 비극의 한복판까지 다다라서야, 해준과 우리 모두 이것은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끝난 줄 알았던 사랑이 다시 시작되었고, 그러나 이 사랑은 영원히 끝맺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게 될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히 끝났다고 믿었던 것들은 수사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에 의해 종결 처리되었을 뿐이다. 어떤 것도 진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미결인 채로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랑. 그리고 그 빈 자리에 남겨진 사람. 영화를 보고 한참이 지났지만, 가슴에 남아있는 먹먹함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기형도 시인의 시가 떠올라 이것으로 갈음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 빈집


나에게 있어 좋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2가지다.


첫째, 영화를 보고 있는데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도대체 어떻게 끝내려고 하는거지?'라는 질문을 하는가. 이야기 전개와 화면에서 느껴지는 모종의 긴장감은 이 영화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강한 확신을 느끼게 한다. '헤어질 결심'은 으레 그럴 법한 장면마다 보란 듯이 예상을 빗겨나가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영화 끝까지 조마조마하며 지켜보게 되는데, 좋은 영화에서 느껴지는 이 위태로움은 즐겁기까지 하다. 좋지 않은 영화도 '대체 어떻게 끝내려는 거야?'라는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아무래도 결이 다르고 해야할까.


둘째,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영화의 만듦새가 어찌 되었든, 이미 충분한 분석과 훌륭한 리뷰는 얼마든지 나와 있다. 굳이 나까지 합세해서 한 마디 얹어봐야, 안 하느니만 못하지 않을지 괜히 염려가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그럼에도 좋은 영화는 기어코 한 마디를 얹게 만든다. 그 영화가 내 안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아직 확실치 않은 채 머무르고 있다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역시 이 혼란을 느껴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인즉 '헤어질 결심'이 무척 좋은 영화라는 걸 에둘러 이야기한 것인데,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게 되어 무척 달뜬 상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잘 만들 수 있다는 게 무척 감탄스럽다. 화면의 아름다움과 이야기의 만듦새를, 내 글로는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게 아쉽다. 아직 '헤어질 결심'을 극장에서 보지 못하신 분들이라면 지금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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