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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Dec 07. 2022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 <올빼미> 감상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에 무슨 재미가 있을까?


역사물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째서 기꺼이 2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과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서까지 보러 온 것일까? 물론 잘 만들었다면 혹은 재미만 있다면, 바보 같은 고민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영화의 어디에서 재미를 느낀 것일까?


어떤 이야기는 결말 자체로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경위로 결말에 이르렀는지 훨씬 중요하다.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지점도 그 과정을 따라가는 일에 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고 말았는지 노심초사하며 지켜보고 있노라면,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화 <올빼미> 역시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한 영화이며, 그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세자가 죽었다,까지만 적었어도 좋지 않았을지.


*이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화 <올빼미>는 조선의 16대 임금이었던 인조(유해진 분)과 소현세자(김성철 분)의 죽음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두고 '세자의 죽음에 얽힌 음모를 소경이 목격했다'라는 상상을 더하며 그에 얽힌 사연을 풀어내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키워드는 '시각'이다. 우리는 영화 <올빼미> 속의 '본다'라는 행위를 능력, 그리고 현상과 실재의 영역에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볼 수 있다/없다

천경수는 낮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어둠 속에서라면 글씨도 읽을 수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먼저 볼 수 있다/없다는 1차적인 능력으로서의 '시각'이다.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천경수(류준열 분) 또한 소경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천경수는 주변이 환할 때 볼 수 없는 주맹증을 앓고 있을 뿐이며, 이를 설명할 방도가 없어서 스스로 소경이라 소개한다. 밤이 되면 천경수는 남들이 낮 동안 활동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능력의 역전을 몇몇 장명을 통해 유쾌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영화 전개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활용하고 있다. 야음을 틈타 벌어진 세자의 죽음을 목격할 수 있었던 인물 역시 전경수 뿐이다. 천경수가 그 현장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애초부터 볼 수 없는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우연이었다. 볼 수 없는 인물이 사건을 목격했다는 이러한 역설은 한 인물에 대한 설정을 넘어서 작품의 전개는 넘어서 주제와 이어지며, 사회에서 촉발되었음을 드러낸다.


보고도 말할 수 있다/없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 중 하나가 시각이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는 당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보고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무언가를 본다는 게 한 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히 독립적인 행위였다면 무엇을 보았는지 말하는 일은 주변의 사람들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관계적인 행위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올빼미>에서는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배경, 그리고 신분질서라는 사회 시스템을 '본다'라는 행위 속에 연결 짓고 있다. 영화 초반, 비슷한 신분의 백정에게 값을 제대로 치루고도 고기를 받지 못하는 장면에서 천경수는 눈치를 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보지 못한 듯이 넘어간다. 그가 실제로는 완전한 소경이 아니라는 점을 숨겨야 한다는 점도 한몫을 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천경수는 영화 중반부 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사실대로 고하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일에 간섭했다가는 목숨만 위태로워질 뿐이라며 말하는 이유도 소경인 자신이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부터 설득력이 없을뿐더러, 설령 누군가 믿어준다 한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천경수는 자신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궁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병든 동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렇듯 '본다'는 일은 능력에 국한된 행위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가 전제된 사회적 행동양식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고도 말하지 않는 게 맹인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해볼 수 있다.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보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이는 소현세자와 천경수의 대화를 통해서 한 번 더 강조된다. 소현세자의 병이 낫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든 다 제대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천경수의 말과, 그럼에도 눈앞의 문제를 제대로 마주하려는 소현세자. 그리고 맹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조를 통해서 본다는 게 그저 볼 수 있다고해서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천경수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본대로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의 '권력'이다. 그리고 반드시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도 않는다. 종종 보고도 말하지 않는 일은 선의에 의해서 촉발되기도 하는데, 천경수는 왕세손이 밤중에 오줌을 지려 바지 적삼을 빨래하는 걸 보고도 자신은 소경이라며 모르는 척 넘어간다. 심지어 궁녀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왕세손이 흘린 물건을 감추며 도움을 주기까지 한다.


어떻게 보느냐, 그리고 본 것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 고민하는 것. 천경수는 마냥 계산적인 인물이 아니기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영화가 진행되면서 천경수는 자신이 본 것을 말하려고 결심을 내린다. 이 순간, 영화는 이 부분에서 '본다'는 단어가 지닌 의미의 핵심으로 한걸음 더 내딛는다. 바로 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다.


본 것이 사실이다/아니다

내가 본 것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타인의 합의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힘이 작용한다. 조선시대에서라면 신분에 따른 위계질서 혹은 권력일 것이다. 영화 <올빼미>는 본다는 행위가 가능/불가능이라는 능력의 차원이 아니며, 보고 나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한 후,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찰된 모든 사실이 반드시 진실이라고 할 수 없으며 여기에는 힘의 역학이 작용한다는 불편한 현실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소현세자의 죽음에 얽힌 상상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의 이형익이 후궁으로부터 비밀스럽게 무언가 주고받는 장면부터, 세자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는 인조의 뒷모습까지. 영화는 소현 세자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관객에게 착실할 정도로 상세히 알려주며 불안감을 쌓아나간다. 마침내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이 세자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인조를 찾아오는 시점에서, 이 모든 일이 인조에 의한 음모였음을 폭로한다. 그리고 인조의 태도를 통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누가 무엇을 보게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인조는 강빈에게 누가 세자의 죽음을 목격했는지 말하라며 추궁하는데, 이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을 보았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이 사실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라는 중요하다는 점이다. 영화가 본다는 행위에 대해 집요할만큼 질문을 던져가며 쌓아올린 이야기 속에서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영화를 추동해왔던 '본다'는 행위에 대한 접근이 영화의 결말에 이르게 되면 어디서부턴가 아귀가 맞물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제대로 봐야 한다고? 왜?

아마도 그 지점은 '제대로 보아야 한다'라는 말과 엮이게 되면서부터다.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청나라에서 목격한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과거의 굴욕에 얽매이지 말고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요청한다. 또한 자신을 치료하러 왔던 천수경에게도 비슷한 말을 건넨다. 천수경이 사실은 소경이 아니고, 밤에는 볼 수 있는 주맹증이라는 걸 알게 되자 거짓말을 했다며 당장 떠나라고 화를 내었다가 그가 동생을 극진히 여기는 마음을 귀히 여겨 청에서 가져온 확대경을 선물하며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정확한 대사가 아니므로 유의 바랍니다-


그 장면에서 부모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천경수에게, 소현세자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똑같은 아버지이지만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비정한 인조와 비교되면서 소현세자의 인물은 그가 지닌 능력 이상으로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천경수가 왕세손의 거듭된 부탁에도 거절을 하다가, 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사실을 말하고자 결심하게 된 데에는 왕세손에 대한 측은함을 넘어서, 아버지로서 소현세자가 보여준 인품도 상당한 이유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보여주려는 메시지와도 일부 이어진다. 시대를 읽지 못하는 왕과 이를 바로잡으려다 죽음을 당한 왕, 그리고 이 모든 걸 알고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모르는 척 넘어가려는 백성. 이러한 구도는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대사와 이어지며, 관객으로 하여 스크린 밖에서 행동을 요구하는 모양새를 띄게 된다.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는 측면에서 사족이 아니었을까 아쉬움이 든다.


왜 제대로 봐야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영화는 변하지 않는 사실로 나아가고 있고, 제대로 본다고 한들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이같은 패배주의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이 맞이할 결말 역시 변함없으며 제대로 보고 행동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조차 없다. 그런데 결말에서 천경수가 인조의 죽음에 개입하며 더욱더 어색해진다. 그 장면에서 어떤 통쾌함보다는, 도대체 뭘 보여주고 싶은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만 초래한다.


메시지가 없더라도 좋았을텐데.

영화 <관상>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의 역모로 인한 단종의 죽음, 세조 즉위라는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관상가와 그 주변인물들이 엮이며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추가하여, 역사적 흐름을 거스르고자 하는 개인의 노력과 끝내 무화되는 순간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관객은 영화 속 인물의 사연에 감정이입하며, 어쩌면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또다른 가능성을 상상해보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데에서 더욱더 안타까워한다. 역사에 대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발생되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스르지 못하고 휩쓸려간 개인들의 비극에 의해 그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올빼미>는 결말 직전까지는 <관상>과 비슷한 흐름으로 나아간다. 천경수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정해진 역사적 사실로 귀결되고야 만다. 그런데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서 갑자기 복수극에서나 취할 법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급선회한다. 아마도 답답했을 관객들에게 나름의 쾌감을 선사하고자, '인조가 학질로 죽었다'는 사실과 엮어내어 해석한 결과겠으나, 대체 영화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또한 '제대로 보라'는 메시지와 섞이면서 영화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알 수 없어지게 된다. 영화가 무언가를 말해야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귀가 맞지 않는다면 '잘못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올빼미>는 지금까지 설계해온 이야기와 이야기가 추구하는 재미가 결말과는 아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경수가 비겁한 개인에서 역사를 뒤바꾸는 당사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것은 좋았으나, 그래서 왕을 죽인 소경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 걸까?


'아랫것들은 보고도 못본 척해야한다'는 말만 봐서는 어떤 혁명적 움직임이라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왜 소현세자의 입을 빌려 제대로 봐야한다고 이야기한 것일까? 구태여 영화에서 어떤 메시지까지 읽어낼 필요 없이 그 과정만 즐기더라도 충분할텐데, 이 부분에서 적지 않은 아쉬움이 든다.


끝으로


역사물을 보면서 우리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다른 가능성이나,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기 때문에 역사물을 보는 게 아닐까? 알고도 보는 이야기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고, 몇 마디 문장으로 요약된 사건에 대해 이토록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조 역에 유해진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나, 영화 장면 곳곳에서 제작자가 자기가 이 장면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의도를 가지고 찍었다는 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영화 <올빼미>는 충분히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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