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라고 하지만, 우리는 볼 수 있는 영화를 본다. 읽고 싶은 책을 읽으려고 하지만, 우리에게 제공되는 책의 존재 말고는 알 수도 없으며, 서울이 아닌 도시에 살고 싶지만 서울이 아닌 곳에서 먹고살 도리가 없다.
고작해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립스틱의 색상이나 파운데이션의 제형, 스마트폰의 용량, 메일 계정 비밀번호(후략)
(이다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193쪽)
개표방송을 보다가 TV를 껐습니다. ‘민주주의의 축제’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제가 기대하는 축제의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 채널에서는 의미를 알아차리기 힘든 과도한 컴퓨터그래픽이 알고 싶은 정보를 죄 가리고 있었고, 다른 채널에서는 나이 많은 남자들이 둘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네, 수다. 토론의 형식을 갖춘 것 같지만 그것은 분명 수다였습니다. 아마 TV 바깥 어딘가, 술집이나 식당에서 그런 내용의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었습니다. 굳이 TV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피로한 일이었습니다. 원한 것은 후보별 주요 공약 사항이나 후보의 정치 참여 이력 같은 것이었는데. 이에 관해서라면 트위터가 훨씬 도움이 됐습니다.
요즘은 TV를 잘 ‘못’ 봅니다. 전에는 ‘안’ 본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최근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경멸하고 비웃는 언어들, 예의 없는 행동들, 공정하지 못한 생각들을 그대로 쏟아내는 방송이 태반입니다. 괴롭고, 화가 나서 볼 수가 없어요. 잘 정돈된 말과 태도를 갖춘 사람들을 보고 싶은 것이 과도한 욕구라도 되는 걸까. 저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TV를 틀지만, 늘 걸려 넘어집니다. 왜 저런 장면이, 어째서 저런 말이 재미있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매일이 잃어버린 볼거리를 찾아 분투해야 하는 삶입니다.
특히 남자 출연자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프로그램들에서 여자를 소비하는 방식은 꾸준하게 저열합니다. 먼저 외모 비하. 여성의 외모에 대해서라면 이들의 언어는 아주 꼼꼼합니다. 키가 작아도, 키가 커도 지적하지요. 입은 옷까지 타박합니다. 머리 스타일, 립스틱 색깔도 문제 삼는 걸 봤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따지자면 다시 글 하나를 더 써야겠지만, 20대 중반 정도만 되어도 많은(!) 나이를 문제 삼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꼭 더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알면 알아서 놀라고, 모르면 모르니까 놀리는 그 은근한 무시들은 또 어떤가요. 여자의 다양한 면모들, 한 개인의 무수한 차이들에 대해서라면, 결코 제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여자들은 오직 젊거나(아니, 어리거나) 늙거나, 예쁘거나 예쁘지 않거나, 내 말을 잘 들어주거나(웃음! 애교!) 들어주지 않거나(‘인성 논란’) 할 뿐입니다. 그러니 젊고 예쁜 여성들이 꽃처럼 화면 한 쪽에 웃으며 앉아 있는 풍경만 연출됩니다.
반면 남자들 각자의 차이는 아주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이해됩니다. 이해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더 나아가 그의 흠결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관대합니다. 저는 출연자들의 면면을 보고 있자면 가끔 분노가 치밀어 무의식적으로 욕설을 내뱉고 맙니다. 저 사람은 음주운전, 저 사람은 성폭행 미수, 저 사람은 도박, 탈세, 폭행, 마약, 성매매……. 휴, 엉망진창입니다. 이렇게 굵은 거름망도 작동을 안 하니 혐오발언을 한 사람이나 차별발언을 한 사람이 버젓이 TV에 나오고, 또 다시 그런 말을 해도 그러려니, 지나갑니다. 그럴수록 언어는 하찮아지고 말초적이고 유치한 상황만 반복될 뿐입니다. 지금이 21세기가 맞는지, TV를 볼 때마다 깊이 의심합니다.
하기야 TV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다혜는 책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에서 이 같은 남성연대는 이미 “세계 문학 전집의 수많은 작품들이” 공고하게 이루어 왔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TV에서, 심지어는 여자들 자신도 때로는 남자의 시선으로 여성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겠죠.
무수한 문학 작품들은 소년이 성인 남성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해왔다.(중략) 수많은 남성 작가들은 그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 소년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탐험해왔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을 매혹시킨 여성들 사이에서 남자 주인공이 어떤 경험을 쌓아가는지, 이른바 세계 문학 전집의 수많은 작품들이 그 순간을 들여다보기 위해 쓰였다.(이다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140쪽)
최근 친구의 추천을 받아 시작한 드라마에서 시한부에, 가족에게는 말 못하는 비밀까지 만들고 있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려 아내를 성폭행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전까지도 불안해하며, 그래도 흥미로운 내용이라 지켜보았지만 더 이상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에 해당하는 아내라는 인물은 전적으로 도구적으로만 사용되고, 스스로 움직이는 여성은 전무합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 주인공의 이해 가능한(?? 그러나 이해해주어서는 안 될) 사정과 그 주변 인물들의 왕성하고 활발한 움직임에 비하면 ‘아니, 저 세계에는 생각하는 여자가 없나?’라는 의아함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 것입니다.
당연히 저도 <개그콘서트>를 본방 사수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장애인 비하, 인종 차별, 여성 혐오인 줄도 모르고 낄낄대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2018년이고, ‘페미니스트’임을 내세운 20대 여성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와 8만 표가 넘는 득표율로 4위를 한 세상이 아닙니까.(한국YMCA 등의 주관으로 진행된 만 19세 미만 청소년 4만5765명의 모의투표에서 박원순 후보는 2위, 최종 당선자는 36.6%를 얻은 신지예 녹색당 후보라는 기사를 보고 저는 전율했습니다.) 시민의 교양과 상식, 정치적 올바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정신이 된 마당에 어째서 미디어는 여전히 저 자리에 머물러 부끄러움 없는 언어를 흩뿌리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언어는 조금도 재미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자신들의 말에 부끄러움 느낄 필요 없던 그들의 권력을 증명할 뿐입니다. 하나도, 도무지, 결코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간다움’을 이야기할 때 기대하는 것은 언제나 성숙이겠죠. 어제의 과오를 오늘 수정하고, 내일은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매일의 성숙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 저는 그것이 인간이며,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여전히 저 자리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마이크를 주는 방송(이라는 세계)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최근 몇 년 간 번번이 실망했고, 다른 희망을 찾아보았지만 실패했습니다.
볼거리는 어디에 있나. 이제 나는 선택해야 합니다. 투덜거리고, 욕하면서 이리저리 볼거리를 찾아 헤매든지 안전한, 무해한 볼거리라고 증명된 것들 또는 그렇게 예측할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보든지 말입니다. 어쩐지 자꾸 고양이와, 어린이와, 자연, 그리고 여성들(만)이 등장하는 볼거리만 보게 됩니다.
*<빅이슈> 183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