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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n 01. 2018

재미있는 여자 이야기

로알드 달, 『내 친구 꼬마 거인』

사랑하는 여섯 살 내 친구


“그런데 정말로 진짜로 당신은 듣기만 해도 그 꿈이 어떤 꿈인지 알아요?”

“알 수 있는다.”

선꼬거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떻게요? 윙윙 웅웅 소리로요?”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는다. 이 세상에 있는 꿈들은 저마다 다르게 윙윙 웅웅 음악 소리를 내고 있는다. 내 이 펄럭 활짝 하는 커다란 귀로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는다.”

(로알드 달, <내 친구 꼬마 거인>, 128-129쪽)


사랑하는 여섯 살 내 친구가 다섯 살일 때였습니다. 우리는 유치원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내 친구는 여섯 살 반으로 올라갈 날을 앞두고 여러 기대와 상상을 하는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섯 살 반의 친구들 몇이 다른 유치원으로 갔다면서,


“새로 오는 애들은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다행히 표정을 감추는 데 성공했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시작된 것인가, 싶었거든요. 책에서 본 실험도 떠올랐습니다.(김고연주, 『나의 첫 젠더수업』) 네 살짜리 아이들은 마네킹을 엄마와 아빠로 꾸며보라는 말에 “남자 마네킹에 양복바지를 입히고 그 위에 분홍색 치마를” 덧입혔고, “목걸이와 귀걸이도 걸어 주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아직 성별(정확히는 사회적 성별)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죠. 반면 여섯 살짜리 아이들은 “여자 마네킹에는 여자의 옷을, 남자 마네킹에는 남자의 옷을” 입혔습니다. “여자 옷, 남자 옷을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문화적인 문법’을 배운다는 나이 여섯 살. 내 친구도 어느덧 ‘남자’와 ‘여자’에 대한 개념을 세우고 있는 중일 터였습니다.


페미니스트 친구

내 친구는 진작 주변 어른들에게서 “남자답게”라거나 “남자는 울면 안 돼”라는 말을 들어왔고요. 저는 번번이 그 말을 수정해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울어도 된다는 말을 해주는 어른 친구가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내 친구에게 필요한 나의 역할을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페미니스트 친구’가 되자고 마음먹은 제가 “새로 오는 애들은 남자였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내 친구의 말을 듣자마자 얼마나 복잡한 심정이 되었는지. 우선 저는 되물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친구야, 왜 새로 오는 친구들이 남자였으면 좋겠어?”

“남자가 재미있어요.”


아, 저는 그때 다짐합니다. 내 친구에게 ‘재미있는 여자’ 이야기를 소개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내 친구 꼬마 거인』의 주인공 ‘소피’ 같은 인물들 말입니다.


선꼬거(BFG, Big Friendly Giant)

고아원에 사는 소피는 늦은 밤 “마법의 시간”에 깨어 있기를 좋아합니다. 혼자의 시간. 그날 밤 소피는 조용한 창 밖 세상을 구경하다가 놀랍게도 “굉장히 크고 굉장히 시커멓고 굉장히 길쭉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한 손에는 아주 길고, 아주 가느다란 트럼펫처럼 생긴 물건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고”있는 “엄청나게 거대한 귀”와 “길쭉하고 희멀겋고 쭈글쭈글하고 거대한 얼굴”을 가진 거인이었습니다. 소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고, 소피를 발견한 거인은 소피를 담요째 납치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소피를 납치한 거인은 다른 거인에 비하면 몸집이 절반 밖에 되지 않는 ‘꼬마 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거인처럼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는 선한 거인, 즉 ‘선꼬거(BFG, Big Friendly Giant)’였습니다. 소피는 이 꼬마 거인과 함께 꿈을 수집하고, 나쁜 거인들에게 악몽을 부어넣어 골탕 먹이고, 마침내는 여왕님의 도움을 받아 나쁜 거인들을 벌주게 됩니다.


저는 소피가 이 동화를 쓴 작가 로알드 달의 실제 손녀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삽화를 그린 화가 퀸틴 블레이크가 로알드 달을 보고서야 꼬마 거인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야 할지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작가가 자신의 딸들이 상상하는 세계를 지켜주기 위해서 『내 친구 꼬마 거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정말 좋아합니다.


호기심 많고 당찬 캐릭터로만

하지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내 친구 꼬마 거인』을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든 <마이 리틀 자이언트>를 먼저 봤기 때문일까요. 저는 로알드 달의 이 사랑스럽고 한없이 다정한 꼬마 거인과 씩씩하고 똑똑한 소피의 우정 이야기를 소설보다는 영화로 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과거에 산 작가와 현재를 살고 있는 감독 차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영화에서 소피는 여자아이라는 조건보다는 그 자신의 호기심 많고 당찬 캐릭터로만 움직입니다. 그리고 소설이라면, 완전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화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그런 은근한 편견은 찾아보기 힘들지요. 가령 이런 대화 내용 같은 것.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의 꿈을 구분해서 두나요?”
“물론이지. 만약 내가 여자 아이의 꿈을 남자 아이에게 주면, 그 남자 아이는 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시시한 꿈이 있어 하면서 잠에서 깨어날 건다.”
(중략)
“남자 아이들 꿈은 엉뚱해요. 하나만 더 읽을게요.”(137-140쪽)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악의적이지도 않아요. 앞서 ‘아쉬움’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고, 더구나 이 동화를 둘러싼 제가 좋아하는 저 에피소드들을 떠올리면 이런 점은 참을 수 있는 수준의 작은 티에 불과합니다. 그런 티에 비하면 이 동화에 재미있는 여자 아이 소피가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친구 꼬마 거인』은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한 번 더 말하자면 그래서 영화를.)


함께 성장하는 거인 같은 친구가 되고 싶다

다시 내 친구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부모도 아닌, 그저 친구일 뿐인 제가 여섯 살 인생에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펄럭 활짝 하는 커다란 귀”도 없고, ‘후롭스코틀’을 만들어 함께 마시며 행복한 뿌웅 놀이를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매일 다짐합니다. 기꺼이 소피에게 곁을 내어주고, 소피와 비밀을 공유하고, 소피와 모험을 하고, 끝내는 소피와 함께 성장하는 거인 같은 친구가 되고 싶다고요. 내 친구가 ‘남자라서’ 참거나 ‘여자라서’ 다른 멋진 사람과 친구가 될 기회를 놓치는 일은, 부디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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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80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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