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나는 ‘모든 것이 잘 될 거야’라는 상투적인 희망의 약속이나 위로의 말이 어떤 상황에서는 오히려 고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서 그렇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잘 되는 ‘장밋빛 인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흑처럼 느껴지는 절망의 터널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인지하는 것, 그 암흑을 바라보는 ‘나’가 가느다란 햇살을 만들어내어 암흑과 햇살 두 축 사이에서 춤추기를 연습하는 것, 그것이 살아 있음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엄숙한 과제인지 모른다.(강남순, 『배움에 관하여』, 50쪽)
‘두 축 사이’에서의 ‘춤추기 연습’, 그 ‘엄숙한 과제’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의심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강남순 교수가 강조한 것도 그래서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우리의 삶에서 의심은 불가피를 넘어야 합니다. 필수의 범주에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의심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쪽도, ‘암흑처럼 느껴지는 절망의 터널’ 쪽도 모두 의심하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의심을 확장하는 일은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이죠. 괴롭고, 더딥니다. 그럼에도 ‘필수’라고 말하는 것은 그 경계에, 암흑 속에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라는 나의 소수자성은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880명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숫자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2016년(1996년이나 1976년이 아니라)에 국내 또는 해외로 입양된 아기의 숫자, 880명은 그러니까 너무 많았습니다. 찾아보니 집 근처 초등학교의 전체 학생수가 약 960명이었습니다. 6학년 인원을 빼면 880명과 아주 가까워집니다. 그 많은 아이들이 불과 일 년 동안 입양 ‘보내졌습니다.’그중 해외로 입양된 아기는 334명. 거의 매일 한 명이 입양된 셈입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부조리를 분석한 책 『이상한 정상가족』의 저자 김희경은 한국이 “OECD 회원국 중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유일한 나라”, “전 세계에서 해외입양을 가장 많이, 가장 오래 보낸 나라”임을 지적합니다. 입양 보내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민간 기관이며, 국가는 심지어 입양을 보낸 후 국적을 박탈했다는 점을 꼬집습니다. 입양 후 국적 박탈이라면? 다음 데이터를 찾아보고 저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외로 입양된 약 17만 명 가운데 입양 국가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이 2017년 8월 기준으로 약 2만6000여 명이었다는 사실. 도대체 이 숫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정말이지 국가의 존재 이유를 또 한 번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김상필 씨(1983년 8살에 미국으로 입양. 두 번 파양. 양부모가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아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2017년 5월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했다.), 채성우 씨(1980년 8살에 노르웨이로 입양. 2013년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실패하자 우울증 등을 겪다 2017년 12월 한 고시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같은 분들이 이 땅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한국은 입양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뿌리 내리는지에 관심 없습니다. 관심을 둘 때라고는 오직 그 개인의 능력으로 이룬 성취를 ‘한국이 낳은’ 같은 말로 빼앗을 때뿐입니다. 이런 상황이 황당하기까지 한 것은 이 사회가 번번이 걸고넘어지는 ‘저출산’이라는 쟁점 탓입니다. 인구 감소와 노령화, 저출산이 그토록 ‘문제’라면 한국은 왜 입양에 관심 두지 않는가. 왜 지금도 하루에 한 명의 아기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가. 2016년 국내외 입양된 880명 아기의 90% 이상이 미혼모의 아기였습니다.
미혼모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김희경은 책에서 ‘미혼모’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현실과 정체성을 정확히 반영하는 더 나은 용어가 나올 때까지”는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그에 동의하고 여기서도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아기를 출산한 학생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그뿐인가요. 아기를 출산한 직장 여성이 퇴사하는 경우는 97%. 수치가 무의미한 지경입니다. 그렇게 학업의 기회를 잃고, 일자리를 잃은 미혼모가 ‘한부모가족지원법’에 따라 한부모로 인정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양육수당 월 13만원이 전부입니다. 이나마도 2인 가구 기준 월 가구소득이 약 148만원(중위소득 52%) 이하여야 하고 말이지요. 148만원으로 아이를 키우며 생활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차마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회의 낙인과 냉대까지 더해 그 생활을 지금도 누군가는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고, 이것은 말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2월 대학 휴학 중이던 학생이 자신이 낳은 아기를 아파트 복도에 버려진 아기라면서 신고했던 일은 결코 갑자기 튀어나온 사건일 수 없는 것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 인권법>은 ‘가족 상황’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하면서 ‘가족 상황’을 ‘부모-자녀 관계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부모-자녀 관계’의 형태는 혈연이나 입양이 아니더라도 돌봄, 책임, 계약과 유사한 관계를 지닌 모든 상황을 아우른다. 다양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240쪽)
결혼으로 대표되는 ‘정상가족’ 안에서만 출산해야 하고, 오직 그것만이 존재 가능한 ‘가족 상황’이라는 무서운 편견이야말로 사건들의 원인입니다. 입양인들이 비참한 삶을 살게 된 것도, 영아를 유기하거나 살해하는 사건이 계속되는 것도, 더 나아가 저출산이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뿌리는 모두 한 곳,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결혼하지 않고 출산한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 구성원의 삶을 파괴하는 시선과 사회 제도의 미비 아닌가요.
아기는 죄가 없습니다. ‘정상가족’을 선택해서 태어날 능력도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태어났더라도 그를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다름 아닌 사회가 노력해야 합니다. “미혼모 가정이든 입양 가정이든 재혼 가정이든 동성 가족이든 가족의 형태를 불문하고 모든 가족 안에서” 동일하고도 충분한 자원을 제공할 의무가 바로 이 사회에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가족의 해체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새로운 가족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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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78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