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나 칸타쿠지노,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
한때 신이 당신에게 사랑하라고 주셨던 불완전한 사람을 봐줘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신이 허락하신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조금이라도 좋아해보도록 해요. 그리고 여보, 제발, 다시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줘요. - 커트 보니것, <세상이 잠든 동안>, 「제니」중에서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들끓는 삶을 살아내는 것. 이것은 나의 중요한 삶의 목표입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차와 고양이 사진과 섬세한 영혼의 연주곡 도움을 받아 차곡차곡 쌓아올린 일상이 너무 자주 무례하고, 고약한 것들로 쉬이 무너져버리고 말아서. 인간 내면의 어둡고 구린내 나는 바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들, 뉴스들, 권력자의 치졸한 위선들, 무지도 죄악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는 사람들, 그 언어들은 집요하게 일상을 침범합니다. 나라는 인간을 둘러싼 모든 접점에서 폭력의 언어가 잠식해옵니다. 꼭, 화장실 청소 같아요. 말끔하게 씻어낸 바닥에 쉽게 찍히는 발자국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잘 압니다. 삶은 진공상태가 아니고, 나 역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완전함은 너무 거대하고, 하필이면 영향력이 큽니다. 도무지 같은 종(種)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러니까 여기서 부터가 시작입니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멈춰 서서 용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마리나 칸타쿠지노의 책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자선단체 ‘용서 프로젝트(The Forgiveness Project)’를 통해 용서 경험을 공유한 46명의 이야기가 담긴 책입니다. 여기에는 아들을 살해한 소년을 용서한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어머니를 폭행하고 살해한 아버지를 용서한 딸, 유년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자들을 용서한 여성, 전쟁포로, 테러 생존자도 있습니다.
당장 어렵습니다. 용서를 결심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상태로 따져 묻게 됩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를 결심한 사람의 선의는 오롯이 용서를 받은 자에게 가닿을 수 있는가. 전달된 선의가 늘 선한 결과를 낳는가. 용서도 정치화되곤 하지 않은가.
질문은, 끝나지 않고 꼬리를 물었습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저뿐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용서를 선택한 사람의 주변인들조차 그 선택을 혼란스러워했으니까요. “용서한 것을 두고 우리가 딸아이를 많이 사랑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용서가 “모든 살인자들을 사면해 주는 사회를 조장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선택한 사람들은 다시 묻습니다.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하고 묻곤 한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내 입장이다. 내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 자신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증오와 분노, 복수심에 불타올랐다면 어떤 엄마가 되었겠는가? 밥이 죽었을 때 무언가가 일어났고 나는 내 목소리를 찾았다. (194쪽)
“용서는 어려운 단어이다.” 책은 용서의 어려움과 복잡성을 당사자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용서를 결심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차원의 삶으로 이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용서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되어가는’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피해를 입은)누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누구를 용서했느냐, 가 아닙니다. 피해자로 남아 있기를 거부한 사람들, 더 나아가기로 한 사람들, 삶을 온전히 수용하기로 한 사람들의 경이로운 선택을 통해 내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시, 이 세상이 불완전한 사람들의 불완전한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확신, 그것에 근거한 뚜렷한 구분은 차라리 쉽겠지요. 하나뿐인 진실은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답안지가 존재하나요? 결코 아닙니다. 이제 저는 그것을 잘 압니다. 그러니 “어떤 날은 더 커지고, 어떤 날은 시들어서 작아지기도”하는 용서의 역동적인 형상을 지켜보며 용서의 색깔이 흰색이나 검정색이 아니라 회색빛이라는 저자의 말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책을 읽으며 거의 생애 처음으로, 혼자 읽기의 외로움을 경험했습니다. 이 책은 오직 해석되는 과정에서만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례 자체보다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에서만 진정한 가치를 갖게 되므로 저는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다고 간절하게 생각했습니다. ‘회색빛 용서’도 가능하다는 사실, 용서가 “그 행동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용서와 관용은 진실이 수많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일을 깊이 신뢰하는 지인들과 함께 해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할 때만이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아직 완전히 읽어낸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아주 강력한 평화의 도구를 찾았다는 사실일 겁니다. 저는 이 책이 곁에 있어서 분노와 폭력이 나를 잠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같은 생각을 한다면 폭력의 에너지는 우리의 일상을 지금처럼 세게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강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나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며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길을 찾아갈 뿐이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도 길을 찾아가는 여정의 일부이다. 용서란 그 행동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 내재한 불완전성을 용서하는 것이다.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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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76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