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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Mar 11. 2018

여자의 몸이 무엇이기에

러네이 엥겔른,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관절 여자의 몸이

나의 몸은 나의 것. 

이 자명한 명제가 때론 아득하게 들립니다. 나의 몸이 국가의 자궁으로 수량화 될 때, 나의 몸이 드러내서는 안 되는 치수의 몸으로 판단될 때, 나의 몸이 출산을 위한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요구를 받을 때. 저는 내 몸을 온전한 나 자신의 소유로 이해하기에는 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쓰개치마를 뒤집어쓰고 다녀야 했던 조선시대의 여자들부터 목덜미가 드러나는 포니테일 머리를 금지당한 일본 한 중학교의 여자 학생들, 영하 18도의 강추위에도 맨 다리를 드러내는 짧은 치마를 입어야 했던 여자 아이돌까지 여자의 신체에 대한 억압은 방향만 달리할 뿐 시대, 국가, 연령을 초월합니다. 어째서 여자의 몸은 자유로울 수 없는 건가요. 대관절 여자의 몸이 무엇이기에?


그 자체로 문제적

여자의 신체를 바라보아야 할 사물로 생각하는 것, 바로 대상화입니다. 그러니 여자는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조차 화장을 강요받습니다. 영화관, 카페, 편의점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알바노조가 2017년 발표한 여성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꾸미기 노동’에 관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60%가 ‘용모 단정’을 이유로 벌점이나 지적을 받았습니다. 손님이나 고용주로부터 외모 품평을 경험한 비율은 무려 98%, 거의 전부입니다. 나이가 어린, 정규직이 아닌, 심지어 남자도 아닌 여자들이 아르바이트 환경에서 강요받는 꾸미기 노동은 그 자체로 문제적입니다.

20대 초반에 했던 아르바이트가 떠오릅니다. 쨍한 녹색의, 민소매와 짧은 치마로 만들어진 팅커벨 옷을 입고 마트에서 방향제를 팔았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일을 저는 더 이상 못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마네킹 역할은 그 나이의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당연히. 이들을 탓할 순 없습니다

정말 우스운 점은 나이에 상관없이 여자는 마네킹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는 점일 겁니다.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젊어 보이는, 언제까지고 늙지 않는 외모를 유지해야 합니다. 다이어트로 지금 유행하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미디어는 50대의 여자 탤런트가 ‘독보적인 동안 외모’임을 추켜세우고, 의류 브랜드는 다양한 사이즈의 옷을 만들지 않고 ‘S’나 ‘M’ 사이즈에 불과한 ‘프리’ 사이즈를 내놓습니다. 이 은밀한 명령은 지하철 광고와 홈쇼핑, SNS 등으로 따라 들어와 여자들에게 어떤 행동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점점 압력은 부풉니다. 터질 것 같은 압력에 더 크게 짓눌리는 것은 10대일 것입니다. 얼마 전 길에서 똑같은 화장을 한 학생 세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이들은 저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외모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네, 그리고 당연히. 이들을 탓할 순 없습니다. 날씬하지 않은 여자를 놀려대고, 자신의 분야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룬 여자마저 얼굴 품평을 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 중고등학생 중 단식이나 식사 후 구토, 혹은 의사처방 없이 살 빼는 약을 먹거나 한 가지 음식만 먹는 다이어트 등과 같이 부적절한 방법으로 체중감소를 시도한 비율은 2015년 18.5%, 2016년 19.9%, 2017년 23%로 점차 높아졌습니다.(질병관리본부 13차(2017년) 청소년건강행태온라인조사)


인간은 그리 멀티태스킹이 잘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대상화, 팻 토크, 이상화된 미디어 이미지 등 여성의 외모 강박을 조장하는 문화 행태를 연구하는 러네이 엥겔른의 책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정말이지 모두가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여성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여성의 외모에만 초점을 맞추는 문화”를 낱낱이 파헤치고 문제 삼는 이 책에서 저자는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얼마나 일찍부터, 얼마나 많은 순간에 외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지 살펴봅니다. 사회와 산업이 얼마나 거대하고 강력하게 공모하고 있는지 지적하지요. 

흥미로운 것은 책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실험입니다. 피실험자들은 수영복 입어보는 행위만으로도, 이상화된 신체 이미지의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외모를 신경 쓰기 시작했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인간은 그리 멀티태스킹이 잘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외모를 신경 쓰기 시작하자 이들은 ‘스트룹 검사(stroop test, 단어를 보고 단어가 어떤 색으로 인쇄되어 있는지 빨리 말하는 검사)’에서 낮은 점수를 기록하게 됩니다. “정신을 쏟아야 할 것이 많”지만 “소중한 주의와 집중을 신체 모니터링과 맞바꾸”고 있는 셈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저는 외출할 때마다 머리가 짧았으면, 화장을 안 했으면, 옷 고민 없이 그냥 교복을 입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외출 시간을 30-40분은 줄일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잠을 자거나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올 봄 유행하는 컬러가 뭔지, 피부를 빛나게 하는 홈 케어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순전히 나 자신의 호기심에 의해 알아보고 싶습니다. “피부가 상했네, 요즘 피곤한가봐.”라거나 “진짜 신경 안 쓰고 나왔네.” 같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멋진 여자들처럼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여기서 벗어날 훌륭한 방법들을 모색하지만 뾰족한 수를 내놓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저자는 그냥 벗어나자고, 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미약한 개인이 단숨에 사회를 바꿀 수 없으니까요. 우리 각자는 그저 선택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책에 등장하는 어떤 멋진 여자들처럼 외모보다는 나의 선호와 즐거움에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날씬한 몸이 아니라 건강한 몸을 위해 운동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 말아야 할 목록은 길다. 이상화되고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담은 미디어를 멀리할 것. 이런 이미지와 마주친다면 최대한 관심을 갖지 말 것. 자신을 미디어의 여성 이미지와 비교하지 말 것. 팻 토크를 하지 말 것. 심지어 그 주변에 있지도 말 것. 다른 여성의 부정적인 보디 토크를 부추기지 말 것. 다른 여성의 외모에 대해 말하지 말 것. 신체 모니터링을 요구하는 옷을 입지 말 것. 외모 위주의 SNS에 중독되지 말 것. 딸에게 몸무게로 압박주지 말 것. (273쪽)



http://m.yes24.com/Goods/Detail/54587899




*<빅이슈> 174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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