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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Feb 11. 2018

피 흘리는 여자들

코니 윌리스, 『여왕마저도』

은폐의 도구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깜짝 놀랄 겁니다. 어쩌면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주변의 여자들은 지금 생리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라도. 같은 공간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버스를 타고, 일을 하고, 식사를 하는 여자들은 아래로 피를 흘립니다.

이 말은 여자들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친구 셋만 모여도 누군가는 생리를 하거나 곧 할 예정이거나 방금 끝이 났습니다. 여자들은 생리를 “옮았다”고 말하고, 누구 한 명은 가지고 있을 생리대를 빌리고, 그 (최소한의)한 명은 기꺼이 가방에서 생리대를 꺼내 빌려줍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물론, 빌려주는 것이 생리대입니다. 눈물 나는 피의 연대입니다.


생리대가 없어서 끔찍했던 순간들 때문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생리라는 것이 없다는 듯 피 흘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거의 공포에 가까운 심정이 됐던 각자의 경험들 때문이에요. 가지고 있는 모든 가방에 2-3개씩 생리대를 채워 넣는 번거로움은 피 묻은 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참혹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혈량이 많은 첫째 날과 둘째 날은 거의 한 시간에 한 번도 화장실에 가게 되지만 사회는 이런 여자들을 결코 발견할 수 없겠죠. 여자들은 생리 하는 자신을 발견당해서는 안 된다고 일찍부터 가르침 받아왔으니까요. 검은 비닐봉지, ‘그날’이나 ‘마법’ 같은 은폐의 도구들이 주어졌습니다.

 

심지어 무식하게

따지면 참 기괴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경을 한 이에게 뻑적지근한 축하를 할지언정 이후의 생리는 외면하는 것.(초경을 시작하자 꽃다발과 목걸이, 가족들의 축하를 선물 받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부러워하며 초경을 기다렸지만 저의 경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엄마에게 피 묻은 속옷 손빨래하는 법을 배웠을 뿐입니다.) 1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거의 모든 시기에 여자들은 주기적으로(약 한 달에 4-6일 동안) 생리를 하는데 정작 생리하는 여자들의 서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무식하게 엄마의 완경을 부러워하다가 완경으로 인한 호르몬 문제와 건강 악화 등에 대해 알게 된 건 생리를 시작한지 거의 2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은폐의 도구가 적극적인 방식으로(탐폰, 기구, 약 등) 발전하지 않은 것은 더욱 이상합니다. 2017년 5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생리용품 사용실태 및 인식도 조사’를 보면 일회용 생리대사용 비율은 80.9%. 이어 탐폰(10.7%), 다회용 생리대(7.1%), 생리컵(1.4%) 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은 생리를 하되 불편하게, 그마저도 화학 물질 덩어리를 신체 일부에 꼭 붙여두고 불쾌한 냄새, 원인 모를 생리통, 피부 습진 등과 싸웠던 겁니다.

 

해방 후 20년

여성들은 대리모, 반낙태주의, 태아의 권리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단결하지 못했지만, 생리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자 단결했다. 여성들은 ‘해방’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어 집회와 시위, 청원을 조직하고 추방당하고 감옥에 가고 상원의원을 선출시키고 수정 법안을 통과시켰다.(코니 윌리스, 『여왕마저도』, 172쪽)


암메네롤이라는 약이 개발되었습니다. 악성 종양을 수축시키는 용도로 개발된 이 약이 놀랍게도 자궁 내벽을 흡수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여자들은 ‘해방’을 눈앞에 두고 국가의 빠른 사용 승인을 요구했습니다. 우습게도 남자들이 반대했습니다. 종교적 우익, 생리대 제조업자들도 마찬가지였고요. 특히 흥미로운 것은 가톨릭교회였습니다. 이들은 “여성을 사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암메네롤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단결”했습니다. 생리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추방을 당해도, 감옥에 가도 됐습니다. 코니 윌리스의 소설 『여왕마저도』는 해방 후 20년, 생리를 하지 않는 여자들과 생리를 하겠다는 여자들의 흥미로운 논쟁터를 배경으로 합니다.


인간은 참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해방 20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자 어떤 여자들은 ‘사이클리스트(자발적으로 생리를 하겠다는 단체)’가 됩니다. 무려 자발적으로 말이지요.(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코니 윌리스는 사이클리스트에 가입하려는 딸을 둔 집안 여자들의 참혹했던 생리 경험담을 소설 속에 펼쳐 보입니다. 이 열띤 경험담은 진혼곡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승리는 당연히 해방된 여자들에게 돌아갑니다. 딸의 사이클리스트 가입 의지를 꺾은 것은 해방 이전을 지낸 할머니와 엄마의 경험담이었지요. ‘여왕마저도’ 피를 흘린 적이 있다는 사실, 때마다 머리를 자르려 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가위를 치워야 했을 정도로 우울감에 시달렸던 생리 전 증후군의 존재, 몸이 퉁퉁 붓거나 끔찍한 생리통 때문에 핫팩을 끌어안고 지내야 했던 경험들을 전해들은 딸은 이윽고 엄마에게 따져 묻습니다. 왜 그런 이야기들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미친 사람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일부러 하겠어요!”라고. 딸에게 엄마는 말합니다. “어두운 압제의 시절이었지.”

 

그래요, 지금 우리가 그 어두운 압제의 시절을 삽니다.

  

생리 때문에 죽은 여자

하도 답답해서 뒤져본 겁니다. 2017년 한국의 많은 여자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생리대 파동’, 그 이후를 말입니다. 정부의 N개년 생리대 대책, 전문가 참여형 정부의 전수조사 같은 것을 기대했을까요. 결과는 각오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낙관이 지나쳐 번번이 괴로워하는 제가 마주해야 했던 것은 반품 생리대의 재판매 뉴스였을 뿐. 계절이 두 번 지나는 동안,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는 실험과 식약처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조사결과와 생리대 제조업체들의 회수 및 환불 이후 이 사회가 발을 내딛은 곳이 겨우 거기라니요.


생리대를 대하는, 생리 하는 여자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에서 한 사회의 인권 수준을 엿봅니다. 반품 생리대 재판매 기사를 본 직후 공교롭게도 저는 생리 때문에 죽은 여자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차우파디’(chhaupadi, 힌두교에서 생리 중이거나 출산한 여자를 오두막이나 외양간에서 지내게 하는 악습)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1월 8일 네팔에서는 생리를 한다는 이유로 오두막에서 지내야 했던 젊은 여자가 추위를 피하려고 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연기에 질식해 죽었습니다.

어두운 압제의 시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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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72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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