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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Dec 11. 2017

그러니까, 어려운 여자들

록산 게이, 『어려운 여자들』

우리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계절 감각은 머리보다 몸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흐린 하늘, 나쁜 공기, 쌀쌀한 기운이 시계를 1년 전으로 되돌려놓습니다. 분노한 사람들과 그 거리와 함성이 떠오릅니다. 대통령의 비선, 날짜의 재배열로 밝혀지는 그날의 행적들은 다시 생각해보아도 충격입니다. 그때 뉴스에서는 ‘집단 우울증’이라는 말을 했었는데요. 그래요, 기억이 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던 때.

그 시간을 지나온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요.

저는 우리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간을 지나면서 성공의 기억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희망을 증명하는 신호들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싸움은 더 치열해졌습니다. 더 은밀해졌습니다. 싸움의 대상은 계속 생겨나고, 희망의 기색은 자꾸 나타나는 실패의 경험으로 희미해집니다. 그것이 힘이 듭니다. 싸움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사실, 더디게 변화하는 세상과 그마저도 변화를 뒤에서 잡아 당기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 이것들이 슬픕니다.


재차 질문할 수밖에

되짚어보면 어떤 사람들의 싸움은 광장에서도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존재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지우지 말라고, 자신들의 요구에도 귀 기울이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광장에서 여성비하 발언을 들었고,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나중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독일 공익 정치 재단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올해 ‘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로 촛불집회 참여 시민들을 선정하기까지 했지만 그곳에서 얼굴품평을 당했던, 시민 아닌 여자로만 남았던 사람들의 기억을 과연 ‘평화’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여성들은 정권을 비판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시위에 참가했지만, 광장의 언설은 ‘정의와 국가를 구현하려고 나선 여자들’로 그들을 설명한다. 이 언설에는 여성이 정의와 국가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정의와 국가의 타자로 구도화되어 있다.(김은실, 『말과 활 13』, 38쪽)


그러니 그때 말한 ‘나중에’는 언제 오는지 재차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옆집에서 살인이 난 것처럼 느끼지만

트위터에는 화장실 문에 작은 구멍이 수두룩하게 뚫린 사진이 종종 ‘인증’됩니다. 도서관, 영화관, 지하철 등 장소불문입니다. 여자들은 볼 일을 보러 화장실에 가서 구멍을 찾고, 휴지로 구멍을 메우고, 실리콘 칠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사회의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정말 궁금해집니다. 한샘, 현대카드 등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사건에 분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째서 어떤 사람들에게만 더 크게 전해지는지. 누군가는 이 뉴스를 옆집에서 살인이 난 것처럼 느끼지만 누군가는 이 뉴스를 가본 적도 없는 먼 나라에서 소요가 일었다는 뉴스만큼이나 멀게 느낍니다.


필요할 때만 사람과 눈을 맞추고 남자와 눈길이 마주치면 턱을 내밀고 턱선이 강인해 보이도록 이를 앙다문다. 늦은 시각에 퇴근을 하거나 바에서 나올 때면 반드시 콜택시를 불러 타고 차가 건물 앞에 설 때는 재빨리 길거리를 훑어보며 택시에서 내려 현관까지 짧은 거리를 걸어가는 게 안전한지 확인한다. 한번은 남자 친구에게 이런 걱정거리들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그가 말했다. “자기 완전히 미쳤구나.” 직장에서 새로 사귄 친구에게 똑같은 말을 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자기는 미친 게 아니야. 여자일 뿐이야.”(록산 게이, 『어려운 여자들』, 65쪽)


그러니까, 어려운 여자들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자들은 쉬울 수가 없습니다. 평생의 경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평화시위’라고 일컬어지는 공간에서도 전쟁을 벌어야 했던 여자들은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목소리에 동의하기가 힘이 듭니다. 나아진 것이 여자들의 세상은 아니니까요. 세상이 변했다고 하는데 여자들은 여전히 여자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선정적인 옷을 입고 장기자랑을 해야 합니다. 상사의 성희롱 발언에 아직도(!) 웃는 얼굴로 있어야만 합니다. 얼마 전 52일의 파업을 끝낸 LG생활건강의 여성노동자 중 53% 이상이 성희롱 피해를 경험했으며, 72%가 피해 상황에 순응했다고 했다는 한국여성민우회의 조사는 여자들이 처한 명백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 여자들은 아직도 밤길을 두려워하고, 택시를 타면 차량번호를 지인에게 전송합니다. 집 근처까지는 가되 집 앞에서 내리지는 않습니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을 합법화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2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낙태죄 폐지는 여전히 ‘논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사생활 침해 등 무차별 공격을 받았던 ‘마중물샘’ 최현희 교사를 저는 전적으로 응원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도 권력

여자인 저는 이런 세상을 도무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열을 냅니다. 번번이 우울해합니다. 모든 사안을 한껏 예민하게 바라봅니다. 절망합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면서 어떤 사람들은 사회의 진보와 성숙을 말하고, 그런 제게 과민하다고, 천천히 변화시키자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도 권력. 이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어려운 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프로 농구 선수를 ‘주부 슈터’라고 일컫는, 남녀 선수 포함 세계 배구 선수 중 1위 연봉을 받는 김연경 선수에게 언제나 ‘배구 여제’라는 수식을 붙이는 기사들을 보면서도 화를 내고 마는 저는 여기에 진보와 보수가 없다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게 생각합니다. 슈터 이전에 주부인, 선수 이전에 여자인 존재로서 명명되는, 언제나 ‘사람’ 이전에 ‘여자’인 어떤 사람들. “언어에서 그 나라의 영혼을 거의 모두 추론해낼 수 있다”(랄프 왈도 에머슨)고 한다면 이 나라의 영혼 안에 여자는 항상 타자에 머물러 존재합니다.


그것이 남자들에게도 좋습니다

“여성은 적극적인 저항의 주체이고, 또 새로운 정치의 참여자이고, 새로운 정치의 장을 만들어가는 주체”(김은실, 『말과 활 13』, 46쪽) 라는 말을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길 바랍니다. 여자들이 왜 그렇게 예민한가, 왜 어려운 여자들이 그렇게 많은가, 라는 질문은 잘못됐습니다. 저항의 주체로서, 정치의 참여자로서 여자들의 위치를 인정하고 이들의 목소리에 연대하는 것만이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일 겁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이 남자들(이라고 부르는 사회 전체)에게도 좋습니다. “여성주의가 저항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협상 수단”이라고 말한 정희진 선생의 말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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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68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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