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늙은 치안판사가 나른하게 관리하고 있는, 평화롭던 제국의 어느 변경(邊境). 이곳에 수도의 경찰, 죨 대령이 찾아옵니다. 뜻밖의 방문, 이유는 더욱 뜻밖이었습니다. 이들은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야만인'의 존재를 밝혀내기 위해서 왔다고 말합니다. 죨 대령을 맞이하며 치안판사는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침묵과, 검은 안경으로 건강한 눈을 가리고 하찮은 것으로 신비함을 과장하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지만 그걸 억누르려고 애”(11쪽)를 씁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한가로운 변방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17쪽)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수도의 이방인들에게 이곳이 야만인에게 위협받은 적 없다고 안심시킵니다. 이것은 무위에 그칩니다. 정체 불분명한 야만인의 존재를 사이에 둔 치안판사와 대령은 그러므로 묘한 긴장 관계에 놓입니다. 벌써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과연 야만인은 존재하는가? 그들을 잡아들이면 제국은, 이 변경은 안전해지는가?
평화로운 마을은 군인의 등장으로 인해 도리어 “기습과 경계의 시대로 되돌아”(68쪽)갑니다. 긴장이 커집니다. 끝내는 “소녀가 강간을 당”(210쪽)하는 범죄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야만인의 짓이라고 말지만, 정작 '그' 야만인은 본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 약자들입니다. 군인들은 어쨌든 '일'을 해야 합니다. 포로라며 야만인 용의자들을 잡아옵니다. 노인, 어린이, 나약한 어부들.
늙은 치안판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신네가 찾는 야만인은 없다고 외칩니다. 이것은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는 결국 반동인물로 낙인 찍히고 감옥에 갇힙니다. 고문과 모욕이 이어집니다. 평화를 원했던 주인공은 무기력 속에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이 놀라운 은유의 세계.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우리네 현실을 자꾸만 상기시킵니다. 제국(국가)이 확인되지 않은 정체의 야만인을 소탕하기 위해 공권력을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희생자가 태어나고, 그렇게 발생하는 범죄를 야만인에게 씌우는. 국가 스스로가 위기를 조장해서 권력을 공고화하는 일련의 작업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남자', 그것도 권력과 지위를 갖는 성인 남자의 일이기 때문에 그밖의 '주변' 존재들은 모두 지워집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의미가 있는 여성은 거의 없습니다. 의미가 있는 노인도, 어린이도 당연히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짓밟힌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원래 없었던 것마냥 하나같이 주변부로 밀려납니다.
하지만 있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재하는 인간들입니다. 중앙과 주변을 분리할 수 없는, 큰 의미와 상대적으로 적은 의미를 구별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자명한 존재들입니다. 그 한 명 한 명의 개인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그것을 보면 제국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반복해서 목도하고 있는 느낍입니다. 거대함에 의해, 대의에 의해, 조직에 의해 우리는 반복해서 타락하고 있습니다. 치안판사의 외침, “너는 이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있어!”(181쪽)라는 말이 슬프고 또 괴로운 이유입니다.
나는 평화로운 게 좋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게 어쩌면 좋은 것일 게다.(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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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71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