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일기 열 번째
작은 새처럼 후추가 낑- 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어느 때는 온몸을 다 맡기면서 마음을 활짝 연 것 같다가도 금방 달팽이 더듬이처럼 움츠리기 일쑤인 후추는 아침잠 많은 나를 깨울 때도 조심스럽다. 몸을 덤벼오는 법이 없다. 이제나저제나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다가 이 덩치 큰 인간의 뒤척임이 달라졌다는 걸 눈치 채면 그때 낑-. 사실 잠귀가 밝은 편이어서 밤새 후추의 잠꼬대(강아지 잠꼬대 어쩜 이렇게 많이 하는지??)와 코골이를 다 듣는 나는 후추가 잠에서 깨 나를 기다리는 순간을 대개는 알아차린다. 알지만, 침대의 유혹에 못 이겨 자는 척 하는 것이다. 그러다 선잠이 들어 마음 사나운 꿈을 꾸기도 하고. 그러니 후추가 낑- 하면 그건 정말 일어나야 할 때라는 의미다.
기지개를 켜고, 창문을 열고, 창문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다. 후추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 무릎 위로 올라온다.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한참 핥고 나면 그제야 아침이라는 듯 얼굴을 내 무릎에 괴고 반쯤 누워 창밖을 바라본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관찰할 것이 많은 후추에게 창밖은 어쩌면 후추의 넷플릭스일지도. 바깥을 보면서 코를 벌렁거리고 바쁘게 주변을 살피는 후추를 내려다보며, 따뜻한 몸을 내준 후추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손하게(!) 후추의 털을 쓰다듬는다. 만족한 후추는 몸을 더욱 기대온다. 후추와 나는 한참을 그 시간에 머문다. 아무리 다리가 저려와도, 그대로. 그 순간 우리는 온전히 여기에 있다.
바로 현재에.
프리랜서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일까. 머릿속은 늘 해야 할 일들을 줄 세우느라 쉴 틈이 없었다. 자기 전에는 내일 할 일을 30분 단위로 생각하다 잠을 쫓아버리기도 했고. 후추를 데려온 직후에도 그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아서 수첩에 '7:00 후추밥/놀기 - 8:30 외출 준비(노즈워크 세팅) - 10:00 집에서 출발' 같은 메모를 해가며 계획을 세워야 안심이 됐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계획대로 하기 싫어서 또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그렇게 지낸 것이 한참이다. 심지어 '후추와 놀기' 시간에도 조바심을 냈다. 계획한 시간 안에 산책을 다녀왔으면 하는데 후추는 목줄을 무서워했고, 이제는 낮잠을 자야할 텐데 똘망똘망 기운이 넘쳤다. 멘붕의 순간은 나를 놀리듯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아침만은 달랐다. 그것은 무척이나 충만한 시간이었다.
얼마 전에는 졸린 눈으로 창문을 열었는데 아침 햇살이 눈물 날 만큼 아름다웠다. 시야는 영화처럼 깨끗하고, 새소리가 이슬처럼 싱그러웠다. 그 햇살, 그 소리와 냄새가 분명 후추도 좋았을 것이다. 내 무릎 위에서 후추는 30분을 앉아 있었다. 다리는 이미 마비되었고, 그날은 해야 할 일들도 많았는데. 뜻밖에 그 시간 동안 나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드물게 아름다운 햇살이 아까웠기 때문이었을지 모르고, 후추가 행복하다는 것이 후추의 심장에서 내 허벅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면서, 이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햇빛을 받은 후추의 검은 몸이 서서히 데워졌다.
제주에서 강아지 '냇길'과 살고 있는 이연수 작가님의 『너와 추는 춤』을 읽었다. 1권에 수록된 '쓰다듬 자판기' 라는 만화에서, 소심한 강아지 냇길은 같이 사는 인간에게 거의 요구하는 게 없지만 쓰다듬어달라는 요구는 분명히 한다. 어느 날도 어김없이 냇길이 쓰다듬을 요구하자 기쁘게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작가님은 이렇게 적는다.
"서로의 애정을 확인할 시간은 꼭 필요하다"
강아지는 어찌나 나를 현재에 있도록 하는지. 늘 현재를 사는 강아지가 놀라운 집중력으로 오독오독 밥을 먹을 때, 어제 갖고 놀던 장난감을 또 열심히 갖고 놀 때, 매일 다니는 산책길을 매번 처음처럼 즐길 때, 그런 강아지가 내게도 곁을 내어준 덕분에 나는 그전까지는 좀처럼 살아보지 못했던 '순간'에 머무른다. 그 순간에는 오직 순간만 있다. 실수 범벅인 과거나 알 수 없어 걱정스럽기만 한 미래는 없다. 이 순간에는 우리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내 앞에 있는 이것만이 중요하다고 후추는 매일 나에게 가르쳐준다. 우리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자꾸 과거로, 미래로 가지 말라고.
안타깝게도 강아지의 시간은 나보다 훨씬 빠르게 흐른다. 그 생각을 할 때면 번번이 애틋해져서 내일 할 일을 걱정할 시간이, 미래를 막막해 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걱정하고, 고민할 시간에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을 그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후추를 벗어나면 관성처럼 금방 걱정하는 사람으로 돌아가지만 후추는 그런 나를 번번이 지금에 데려다 놓는다. 그러니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겠다.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 전 녹음한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책 소개 코너 <어떤,책임>에서 이런 생각을 담아 이야기해보았다. 후추 덕분에 알게 된 '지금, 여기에 있기'의 소중함을 많은 사람들과 얘기해보고 싶어서. 반려인이라면 모두가 공감하며 볼 『너와 추는 춤』을 같이 보고 싶어서. '미래가 막막할 때' 이런 생각을 해보자고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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