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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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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n 06. 2021

기억하는 마음들

후추일기 열두 번째


강아지를 입양했다고 하자 가장 기뻐해준 사람들은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는 후추 입양이 결정되고, 아직 후추가 집에도 오지 않았는데 후추의 장난감과 목욕 용품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그의 강아지가 아주 좋아하는 것들로 엄선했다며 보내준 장난감들은 과연 대단했다. 후추는 지금도 매일 그 장난감들을 끼고 지낸다. 남편의 직장 후배는 고구마를 보내왔다. 고구마로 말하자면 엄마가 직접 재배한 것을 받아보는 경험 외에 이런 식의 선물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강아지가 고구마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후추 간식으로 주라고 보낸 것인데 얼마나 많이 먹으라는 것인지 두 박스가 왔다. 그걸 보고 나는 푸하학-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후추는 당연히 고구마를 너무 좋아해서 숨겨두고 아주 가끔씩만 먹여야 했지만.


어제는 후추를 데리고 남편의 직장 동료의 남자친구(!)의 집에(!!) 갔다. 열세 살 강아지와 함께 사는 그분은 강아지 경험이 많은, 약간 강아지 전문가여서 나와 남편은 후추와 두 달간 살며 품게 된 고민과 후추 맞춤 교육법 등을 묻고 들었다. 함께 산책도 두 번이나 했는데 앞장서 가는 극강의 모범적 산책 모습 덕분인지 후추는 그들을 따라 아주 신나게 산책하고, 실외배변도 어렵지 않게 했다.(이로써 후추의 실외배변 횟수는 더 이상 한 손에 꼽을 수 없게 되었다) 요즘처럼 좋은 날씨에, 그것도 주말에, 자신의 오후 시간과 집까지 우리에게 내어준 그분 덕분에 후추는 집에 돌아오는 길부터 저녁 내내 강아지 중 강아지, 일류 강아지라는 '떡실신 강아지' 상태로 보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분은 우리가 간 뒤 생각해봤다며 후추에게 좋을 교육법이 담긴 유튜브 링크를 보내왔다. 그야말로 '강아지에게 진심인' 분의 다정함이었다.


어떤 생활을 상대가 원하는 만큼 이해해주는 마음.

어떤 일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마음.


하나같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마음들이다. 나는  마음을 전해 받는 일이  세계를  마음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준다는  똑똑알게 됐다.


그 마음들 덕분에 후추를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강아지와 함께 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며 강아지 책을 선물해준 동료, 강아지와 나의 생활을 꾸준히 물어오며 지인에게 추천 받은 강아지 간식을 보낸 친구, 친구들 사이에서 이제 '후추 할머니'로 불리게 됐다고 기뻐하며 언제든 강아지를 봐주겠다고 말하는 시어머니, 후추의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서 선물해준 사람들. 이들의 마음은 후추에게 가족이, 친구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후추와의 생활이 그저 내 안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그러므로 혼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는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들이 갖는 탁월한 감수성에 대해 생각한 일이 있었다. 친구 C와 M은 스무 살 때 만나서 언제 만나더라도 곧장 스무 살로 돌아가게 만드는 친구들이다. C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를 키우는 중이고, M은 이제 갓 돌을 넘긴 아이를 키우는 중이다. M의 집에서 얼마 전, 우리 세 명이 모였다. 그들 틈에서 후추 반려생활의 고충과 나의 심리적 혼란을 털어놓았을 때, 나는 내심 민망해 하고 있었다. 육아의 힘듦에 대해 책으로, 미디어로, 경험담으로 많이 들어왔기 때문인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이 말로도 튀어나와 후추 얘기를 할 때마다 자꾸 "아기 키우는 것은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이라고 부연했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친구들이 내 말이 끝나자 입을 모아 말했다.


"육아랑 똑같지, 뭐. 걱정되고 신경 쓰는 건 똑같아."


친구들은 후추 얘기를 아기 얘기와 똑같이 들어주었다. 덕분에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마음껏 나눴다. 후추를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똑같은 존재로 이해하는 친구들의 자연스러운 태도는 "얘는 종이 뭐예요?"라든지 "저놈의 개..."라든지 심지어 "개들 좀 밖에 안 데리고 나오면 좋겠어" 하는, 벼락처럼 들려오는 말들 틈에서 받은 커다란 위안이자 안도였다. 어디서 어떻게 지적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갑자기 듣고 마는 먼지 같은 차별의 언어 속에서 친구들의 태도는 약자를 돌보는 사람들끼리, 그래서 다른 약자를 바라보게 된 사람들끼리, 어쩔 수 없이 저 스스로가 약자가 되는 사람들끼리 끈끈하게 의지하고 걸어가자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다 똑같은 생명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인식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C와 M이 그런 태도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친구들이라 정말로 기뻤다. 어떤 이들은 자기 바깥으로는, 자기가 만든 울타리 바깥으로는 '이해심'이 한 발짝도 뻗아나가지 않으므로 그랬다.


기억하고 싶은 마음들. 기억해두었다가 좋은 때에 비슷하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들. 이런 마음들은 화려하고 선명한 색깔들 사이에서 쉽게 묻히는 미색이라 힘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마음들이야말로 나의 배경이 되고, 편안한 틈을 만들어주는, 그래서 생활을 튼튼하게 완성시키는 마음이라고 믿는다. 번번이 선택하게 되는 미색처럼.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주는 미색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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