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일기 열여섯 번째
어제 나도 모르게 "후추야, 너랑 사는 거 완전 재밌다. 아주 웃겨"라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아침부터 몇 가지 장면에 낄낄대다가 나온 말이었다. 우선 후추의 '도도도도' 하며 걷는 소리가 아주 웃긴다. 후추 발톱이 마룻바닥에 닿으면서 나는 소리인데 요 녀석의 짧은 다리가 바쁘게 움직일 때 이 소리는 '키키키키'처럼도 들린다. 그 소리가 온종일 나를 쫓아다닌다. 거실에서 세탁기로 걸어가는 중에도 도도도도. 세탁기를 빨래건조대에 널러 갈 때도 키키키키. 웃지 않을 수가 없는 소리다.
참견쟁이 후추는 현관 앞에 앉아 택배를 뜯고 있는 내 옆에 또 키키키키 걸어와 코를 마구 들이댄다. 택배 상자와 안에 담긴 물건에서 나는 맡지 못하는 새로운 냄새, 집 안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냄새가 나는 거겠지. 이를테면 다정한 마음을 카드에 직접 적어 보낸 사람의 손 냄새 같은 것. 아무리 밀봉을 했어도 새어 나오는 그래놀라의 냄새 같은 것. 잠시 동작을 멈추고 후추가 냄새를 맡게 해주었다. 몇 번 더 킁킁거리더니 이내 시크하게 돌아서 간다. "체크 완료"라고 말하는 듯한 무심한 뒷모습이 또 웃겨서 낄낄거렸다.
점심에는 간단하게 샐러드를 해먹으려고 방울토마토를 손질하는데 토마토가 팡 터지고 말았다. 그 토마토즙 몇 방울이 싱크대 밑에 엎드려 있던 후추의 머리와 엉덩이에 올라앉았다. 후추의 검정색 털 위에 빨갛고 노란 토마토 방울이 선명했다. 갑자기 나타난 무늬가 후추와 꽤 잘 어울린다. 영문도 모르고 나를 올려다 보는, 머리핀이라도 꽂은 것 같은 후추를 내려보며 또 한 번 낄낄. 오후에는 낮잠 자는 후추의 머리에 아까 그 방울토마토 자국이 흡사 더듬이처럼 두 갈래로 뾰족하게 솟아있어서 또 낄낄댔다.
후추 덕분에 자주 행복하다.
얼마 전에는 이유 없이 지치고 마음이 힘들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몰아칠 때가 있다. 전에는 그런 마음을 트위터에 끼적이거나 그저 감당하고 앉아 있었을 텐데. 그날은 다른 선택을 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사진을 찾아보면서 곁에 앉아 있는 후추의 가슴팍을 긁어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힘든 마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 곁에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행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 행복의 크기가 너무나 분명히 느껴졌기 때문에. 간단하게 전환이 되었다. BH 시절을 말하자면 불안은 늘 힘이 세고, 그걸 잠재울 내면의 단단함은 영 힘이 없었는데. 문득 이 변화가 놀랍고 기뻐서 후추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행복에 관한 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을 믿는다. 큰 행복은 큰 계획만큼이나 무거워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질려버리는 데가 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직장에 다니던 시절, 좋아하는 선배와 맥주를 마시다가 끝나지 않는 진로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선배는 자신의 노하우라며 이런 얘기를 했다.
"문제집을 한 권 사면 언제 다 풀지 막막하지? 학교 다닐 때 나는 그걸 챕터별로 잘랐어. 낱권을 만들어서 풀었는데 그러면 어느새 한 권을 다 풀게 되는 거야. 지금도 그 방법이 통할 때가 있거든. 너무 멀리 안 보면 돼. 그럼 뭐가 돼도 돼 있겠지."
나는 이 얘기를 행복에 관한 얘기로 알아들었다.
문제집을 한 권 다 풀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니까. 내가 만든 낱권을 하나만 다 풀어도 아니, 낱권을 만드는 행위를 하면서부터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을 계획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낱권의 행복들이 자주 쌓이는 삶은 문제집 한 권 푸는 큰 행복이 드물게 찾아오는 삶보다 윤택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만날 약속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샤워 후에 맥주를 한 잔 마시고, 털친구와 몸을 맞대는 모든 순간들은 낱권으로 만들어두었다. 그러자 나는 자주 행복한 사람이 됐고, 이제는 안 행복할 때면 행복을 즉각적으로 불러낼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행복은 거기에 있으니까.
애니메이션 <스노우 몬스터>에서 주인공 '이'의 사촌동생 '펭'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다. "보이지 않아도 저기 있다는 걸 알잖아. 정말 신나지 않아?" 구름에, 빛에, 어둠에 가려서 별이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저기에 별이 있다는 걸 안다. 아주 구체적으로 낱권의 행복을 꼽아보는 일은 보이지 않아도 저기 있는 게 분명한 별/행복을 나와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일과 같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밤을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