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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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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l 23. 2021

이런 후추를 닮고 싶다

후추일기 스무 번째


최근 몇 년, 나라는 사람의 가장 큰 화두를 꼽는다면 역시 '나다움'이다. 나답게 살고 싶다. 온전히 나로만. 누구의 무엇이 아니라 그냥 나. 어디에 있든, 어떤 관계에 놓여 있든 고유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을 가진 나로서. 이런 생각을 한 것은 결혼제도(결혼과는 확실하게 분리해서 말하고 싶다)와 가부장제의 믿기 힘든 불합리 때문이었다. 가족이라는 굴레를 답답하게 느끼지 않는 개인이 있을까(가부장조차도 때로는 가족을 굴레로, 답답하게 느낄 것이다). 며느리니까, 아내니까, 딸이니까, 누나니까, 이런 말이 옥죄는 나는 그 자체로 결코 나일 수 없었다. 그런 거 말고 그냥 나, 한 사람의 나로 살고 싶다고 몇 년을 간절하게 생각했다. 관계 안에서 달라지지 않고 그냥 나답게. 그런 소망에서 비롯한 것들이 있다. 어떤 말에 억지로 웃지 않는 것, 원하지 않는 곳을 의무감에는 가지 않는 것, 답할 필요가 없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는 것.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매년 진짜로 내가 원했던 것들을 하나씩 정해 실천하는 일인데 2020년에 타투를 하고, 2021년에는 후추와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한 것에는 그런 맥락이 있다. 


'나다움'이란 나만의 욕망과 욕구를 신중하게 들여다보는 일인 동시에 어떤 내가 될지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 동안이 평생에 걸쳐 복잡한 방식으로 억압되어 있던 진짜 나를 끌어올리는 시기였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지향하는 곳으로 나를 이끄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나다움'인가, 하는 문제. 나는 그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이런 사람이고 싶다 목록'을 구체적으로 적어본다. 


이를테면 나는 씩씩한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이고 싶다. 그 생각을 하면 힘 없이 중력에 끌려 구부정했던 자세가 꼿꼿해지곤 한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래를 소리 내 흥얼거리면 기분이 즉각적으로 밝아지는 면이 있다(우리집에서는 그런 사람을 '흥얼거리무스'라고 부른다).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습관이다. 또 플라스틱 음료수병을 물로 씻어 잘 말린 후 비닐택은 깔끔하게 제거해서 분리수거함에 넣는 사람이고 싶다는 바람. 비닐은 가능한 한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는 바람 같은 것. 환경을 망치는 속도를 초라한 개인 수준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늦춰보고 싶기 때문에 품은 목록이다. 같은 맥락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 사람, 집에 쌓여 있는 세탁소 옷걸이를 깔끔하게 모아뒀다가 세탁소에 반납하는 사람(한 번 해보시길. 세탁소에서 정말 좋아한다), 필요한 물건은 중고거래를 먼저 고려하는 사람, 마트에 갈 때 반드시 장바구니를 챙기고, 늘 물병을 챙겨 다니는 사람이고 싶다는 바람은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으려고 한다. 

또 있다. 나는 길에서 마주치는 어린이에게 언제나 웃어 보이는 사람이고 싶다. 세상의 환대를, 다정함을 일상에서 마주하며 성장하는 삶은, 그런 사람들이 성인이 된 사회는 다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막연한 생각이었다가 얼마 전 『리페어 컬처』라는 책을 읽고 확신하게 된 목록도 있다. 나는 가지고 있는 물건을 잘 관리하며 오래도록 쓰는 사람이고 싶다. 환경적인 이유도 있지만 잘 관리된 오래된 물건을 가진 '역사가 있는' 사람이 진정한 멋쟁이, 라는 생각에서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손때 묻은 지갑, 내 몸의 굴곡에 잘 맞춰진 코트나 청바지, 이런저런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보면서 나만의 역사를 쌓아간다면, 그럴 수 있는 환경에서 산다면 정말 좋겠다. 

무엇보다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해서는 책 한 권쯤 꼭 읽는 사람이고 싶다. 한 편의 영화나 다큐멘터리, 르포 기사가 주는 생생함과 몰입도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책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섬세함과 생각의 농도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책에서 책으로 연결되는 경험은 또 얼마나 멋진가. 나는 앞으로도 부지런히 책을 찾아다닐 것이다. 


목록은 계속 늘어난다. 이 목록을 계속해서 늘려가는 삶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요즘 이 목록에 가장 큰 자극을 주는 존재는 역시 후추. 후추라는 탁월한 존재가 곁에 있으니 매일매일이 영감 파티다. 


무엇보다 후추는 화를 내지 않는다. 그 점을 진심으로 닮고 싶다. 후추는 가끔 어떤 소리에 놀라 "멍!" 짖기는 하지만 그것을 화를 낸다고 말하기는 좀 부족하다. 자신에게 자극을 주는 외부의 어떤 것에게 "조심해줘."라고 나지막이 경고를 보내는 느낌이랄까. 그밖에 초인종 소리가 들릴 때 "멍멍!!" 하는 것은 "누구야? 누구?"라는 깜짝 놀람과 반가움의 느낌이고. 원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도 화내거나 실망하지 않는 후추. 이 놀라운 아이는 그럴 때 금세 다른 목표를 찾아내고 거기서 충만한 행복을 느낄 줄 안다. 후추에게 있어 부정적인 감정들은 놀랍도록 사소하게 처리되는 한편 긍정적인 감정들은 순식간에 발견되고, 회복되어 금세 만끽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저런 면을 닮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물론 화 내야 할 때 정확하게 화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화를 내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것 같다. 화를 내는 건 대개 가장 손쉽고도 가장 어리석은 선택일 때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이웃집 사람이 자신의 자녀에게 윽박지르는 것을 목격할 때 그렇다. 그런 이유로 나는 후추처럼, 쓸데없는 화를 품는 대신 침착함과 현명함, 화라는 것 바깥에 있는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들을 더 많이 간직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후추에 대해서도 반드시 말해야 한다. 후추의 깨끗한 사랑의 눈빛. 아낌없이 흔들리고 있는 꼬리 프로펠러. 나를 침 범벅으로 덮어버리는 무한한 애정의 표시들. 후추와 함께 한 시간이 4개월에 불과하지만 나는 후추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이 애는 그걸 모를 틈을 아예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눈을 맞추는 모든 순간에, 한 공간에서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조차 후추가 나를 믿고 전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 애의 안테나가, 그리고 나의 안테나가 서로를 향해 있으니까. 그 감각, 어떤 존재에게 완전히 사랑 받고 있다는 감각은 사람을 좀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 것 같다. 처음 타인에게서 그런 감각을 느꼈을 때는 결혼이라는 것을 했는데 후추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잠시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후추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정한 올해의 목표가 있다. '매달 두 명 이상의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기' 계획. 이 계획은 지금도 무사히 진행중이다. 지난 봄에는 한참 연락하지 않았던 사촌 동생과 그가 함께 살고 있는 어린이에게 내가 감동하며 읽었던 책을 몇 권 챙겨 보냈다. 일찍 엄마가 된 사촌 동생과, 그와 함께 사는 여자 어린이가 일상에서 해방감을 더 자주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담아 보낸 것은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새내기 유령』이었다. 어린이가 책을 좋아한다며 기뻐하는 사촌 동생에게 "앞으로 어린이의 책 담당은 내가 할게"라고 다짐한 참이다. 해보니 주는 마음은 받는 마음보다 훨씬 다채로운 방식으로 나를 기쁘게 했다. 사랑을 표현할 때, 후추가 어째서 그렇게 행복해보이는 것인지 나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쉴 때 확실히 쉬는 후추, 바람이 불어오면 잠시 멈춰 순간을 만끽하는 후추, 매일의 산책으로 꾸준함을 증명하는 후추,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걸어나갈 줄 아는 후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오늘은 오늘만큼의 삶을 사는 후추... 나는 언제나 이런 후추를 닮고 싶다. 그것이 언젠가, 있는 그대로의 나다움이 되기를. 

그런 소망을 품은 삶이 행복하다고, 지금 이 순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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