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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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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Apr 06. 2021

용감한 강아지

후추일기 첫 번째


강아지가 집에 왔다.


이름은 후추. 2020 12월생. 어느 폐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산보호소'에서 구조했고, 무척이나 좋은 임시보호자 님을 만나 잠시 생활하다가 우리집으로 왔다. 나는 1 넘게 '포인핸드' '비글구조협회 카페' 오가며 세상에 너무 많은 유기견과 너무 많은 생명들의 죽음을 의식하며 지내는 중이었다. 강아지들이 죽지 않았으면. 나도 함께   있었으면.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다큐를 보고(넷플릭스 <개와 함께>), 책을 읽으며(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강아지와 함께 사는 나를 상상하며 지냈다. 2 가구인 우리집에  생명이 온다는 것은 너무나  일이고, 함께 사는 사람의 동의와 결심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시간은 자꾸만 흘렀는데. 그런데 후추를 알게 되었다. 겁이 많은, 동시에 용기 있는 예쁜 강아지였다. '후추'라는 이름도 어쩜 그렇게  어울리고 귀여운지 그때부터 나는 '후추가 집에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만 했다. 아마 후추한테 남편 반했는지, 내가 후추 사진을 보여준 다음  출근길에 (드디어) 이렇게 말했다.


"후추,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그러고도 며칠을 더 고민했다. 이제부터는 진짜니까. 온전히 내 결심에 달렸다. 나는 과연 준비가 된 걸까. 내 생활은 완전히 바뀔 텐데. 힘든 일도 있을 텐데. 그래도 좋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이 바뀌었다. 얼마나 덜덜 떨리는 마음이었는지. 고민을 할수록 고민이 더 커진다는 걸 인식했을 때 고민은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의 나야,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아주 하찮아 할 것이다. 분명히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더 일찍 결심하지 않을 것을 탓할 거야. 그런 확신이 들자 용기가 났다.(그때의 내가 낸 용기를 수치로 측정할 수 있다면 좀 알고 싶다. 그만한 용기는 두고두고 나 자신에게도 응원이 될 텐데.)


3월 18일, 임시보호자 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사전 면접)

3월 20일, 마산보호소 봉사자 님께 전화를 받았다. (전화 면접)

3월 27일, 후추가 집에 왔다. (입양!)


사진에서는 귀도 안 펴진 아기였는데, 겁이 많다고 들었는데, 후추는 쫑긋 선 귀를 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용감하게 집을 탐색했다. 화장실 공간으로 적합하다 싶은 곳에 배변패드를 깔아두었더니 정확히 그 자리에만 배변을 했다.(천재 강아지인가!!)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우리는 후추 눈치를 보며 극단적으로 천천히 움직여야 했지만 그래도 후추는 빠르게 적응했다. 그리고 잘 잤다.


처음 이틀은 혼자 자는 밤이 무서울까 싶어 바닥에 이불을 펴고 같이 잤다. 털친구와 몸을 맞대고 자는 감각은 난생 처음이었다. 어째서 이 아이는 처음 본 덩치 큰 인간을 이렇게나 금방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놀랍기만 했고, 나를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서 고맙기만 했다. 후추를 만나 다행이다, 진심으로 자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후추는 다음 날 더 용감해졌다.

내가 움직이면 눈치를 보던 녀석이 이제 나를 따라다니며 덩치 큰 인간이 하는 행동들을 구경했다. 목줄을 너무 싫어했지만 산책을 나가면 앞을 보고 씩씩하게 걸었다. 갑자기 지나가는 자전거에도, 너무 큰 자동차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라긴 했지만 곧 풀숲의 냄새에 집중했다. 집에 돌아오면 더욱 용감해져서 장난감과 씨름을 하고, 나와 눈도 맞췄다. 예쁘게 말려 올라간,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를 보면 저도 저 자신의 용기에 신이 나는 것 같았다.


후추의 용기는 아주 감동적이었다.

후추는 분명히 너무 무서운데 용기를 냈다. 덜덜 떨면서 발을 내딛었다. 지나가기 싫은 방지턱도 망설이다 후다닥 밟아 지나갔고, 처음 가보는 낯선 계단도 꼬리를 내린 채 그러나 힘차게 올라갔다. 그럴 때마다 후추의 목덜미를 긁으며 "대단해!" 응원을 해주면 후추는 더 용기내서 길을 나아갔다. 마른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몸이 펄쩍 뛸 만큼 그렇게 무서우면서도 이내 그 낙엽을 탐색했다.(코 박고 킁킁. 입으로 앙.) 잠시 후추 옆에 앉아 보았다. 후추의 눈높이에서 본 세상은 너무 컸다. 큰 사람, 큰 나무, 큰 건물이 죄다 나를 내려다 보는 듯했다. 처음 보는 시끄러운 물체들(오토바이, 자동차, 자전거)이 예고도 없이 휙휙 지나갔다. 너무 다른 냄새와 소리가 쏟아질 텐데. 그런데 후추는 매 순간 망설이며, 떨며 걸었다. 그 순간을 지난 자신이 조금 더 용감해지리라는 걸 확신하는 몸짓이었다. 그래, 후추야. 우리 더 용감해지자. 오늘 겪은 이 일이 내일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때까지. 그래서 어떤 낯선 것이 다가와도 - 조금 망설이기는 하겠지만 - 물러서지는 않을 수 있을 때까지. 씩씩하게 걸어가자. 저기 더 재미있는 게 있을 테니까. 그런 눈빛을 후추에게 보내면 후추는 알았다는 듯이 다시 귀를 세우고, 꼬리를 예쁘게 말고 걸었다.


용감한 강아지가 집에 왔다.

강아지의 용기를 매일 볼 수 있어서 좋다.  


후추는 이제 그렇게 무서워하던 자동차 소리(소리가 날 때마다 무서워서 으르르 짖었다)에도 자던 낮잠을 마저 잔다. 대단해, 용감한 우리 강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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