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자격증 시험
무언가를 새로이 배운다는 건, 내가 그동안 겪어 온 모든 분야의 잡다한 경험과 가치관을 통째로 뒤흔드는 일이다. 철이 없었다. 동네 카페를 작업실로만 사용할 줄 알았던 글쟁이 한량이 뜬금없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겠다고 도전한 자체가. 몰랐다. 살이 따갑도록 무더운 여름날 불과 5분 만에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주셨던 동네 카페 사장님의 프로페셔널함에 절로 고개를 조아리게 될 줄은. 늘 맡겨놓은 듯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남의 노력’은 나의 ‘처음’과 만나 깊은 존경을 자아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어쨌건 나는 교육생의 신분이 되었고, 한 달 반여간의 공부와 실습 끝에 대망의 바리스타 실기시험까지 치기에 이르렀다. 혹자에겐 아메리카노 한 잔, 카푸치노 두 잔을 만들어 내는 이 2급 시험이 너무 쉬울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바리스타 2급 시험은 껌’이라고도 하던데, 평소에도 시험 공포증이 꽤 있는 나는 굉장히 쉬운 시험 과정 속에서 내가 만드는 게 커피인지 흙탕물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정신을 쏙 뺐다.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이어도 자격증을 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손발이 고장난 상태로 시험을 치른 후 다른 5~60대 수강생 아주머니분들께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편리씨 덕분에 시험 잘 칠 수 있었는데, 연습때 제일 잘 하더니 왜 그렇게 긴장을 했어~’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편리씨 덕분에’. 이 말이 나를 더 쪽팔리게 하는 방아쇠였다. 그렇다. (날 아는 사람들은 놀랍지 않겠지만) 수업 중에 참으로 많이 나댔다.나댐력의 최고봉인 ENFP임을 자랑하듯, 언제나처럼 꽤나 열성적인 수강생 이미지를 가지고 수업을 시작한 나는 선생님의 시험 시연 영상을 카메라로 찍어 정성스레 편집 앱으로 자막까지 달아 수강생 단톡방에 공유하는 오지랖을 떨었다. 왜 그랬을까? 엄마가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고 어디 가서 튀지 말고 조용히 있으랬는데. 게다가 ‘우리 함께 합격해요^^’ 같은 낯부끄러운 메시지까지 첨부하는 솔선수범을 보이고야 만 것이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한 친구들은 내 얘기를 듣고, ‘어떻게 자기가 먼저 나서서 그럴 수 있지, 시작은 호의였지만 끝은 쪽팔림 또는 호구잡힘의 지름길’이라며 매우 놀라워 했다. 난 어리둥절했다. ‘다같이 잘하면 좋지 않아? 어차피 내가 보려고 만든 건데.’ 뇌 속에 꽃밭을 가꾸는 사람처럼 해맑게 대답했던 난 시험을 망치고 나서야 친구들이 ‘나라면 절대 하지 않겠다’ 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끝은 쪽팔림. 정답이었다.
시험은 공개였고 함께 배웠던 커피학원 동기들이 수험생이자 참관생이 되는 형식이었다. 시험 직전까지 머릿속으로 수백차례나 시뮬레이션했던 터라 전혀 당황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내 차례가 되어 시험대 앞에 서니 팔이랑 다리가 한겨울 사시나무처럼 마구 후달렸다. 수강생들과 돌려봤다는 바로 그 시험 준비 영상을 보며 달달 외웠던 기물 배치 순서들과 수백번 연습했던 ‘물 먼저 드리겠습니다’ 라는 멘트는 내가 내렸어야 할 우유 스팀 거품처럼 뭉게뭉게 새하얗게 사라졌다. 해야 할 루틴을 미친 사람처럼 마구 건너 뛰고,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해 커피 그라인더 위를 잡았다가 호퍼(원두를 담는 통)를 잘못 건드려 커피콩이 와르르.. 내 마음도 와르르...멘탈도 와르르....총체적 난국, 와르르 맨션이 따로 없었다. 너무 놀라 작업대를 수습하다가 그라인더 전원을 꺼버리는 대참사마저 일으켰으니, 시험 중간에 ‘이..이거 안켜져요! 어떡해요!!’ 를 외치며 장내를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 바로 시험 공포증이 있는 과다 오지랖 인간, 바로 나라는 인간의 최후였다.시험을 마치고 영혼이 탈곡된 표정으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다.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수고로움을 감당해줘 고맙다며 수업시간에 박수세례까지 받지 않았다면, 그때 그 순간의 잠깐의 머쓱함과 자아도취를 느껴버리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쪽팔리지 않았을 텐데...으아악! 왜 모든 실패의 목전에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오지랖이 눈치없이 자리 끼어들어 죄 없는 이불만 밤마다 걷어차이는 것인가? 사실 늘 나대는 애들은 그 순간엔 모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전자동 커피 그라인더 속에 내 한 줌 부끄러울 줄 모르는 이 오지랖을 더해 사정없이 갈아버릴 것이다.
망친 시험의 여파는 시험 결과 문자를 받기 전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일주일 후 도착한 문자는 예상 외였다. 해피 엔딩, 합격이었다. 심지어 생각보다 높은 점수인 81점이라니, 어리둥절했다. 학원에 전화해서 잘못 나온 거 아니냐고 물어보려다, 행여나 ‘저런, 전산상의 오류군요. 정정해드리겠습니다. 불합격입니다’와 같은 상황이 생길까봐 문의하지는 않았다. 묵음으로 혼자 발을 구르며 기뻐했다.얼마전에 본 특수부대 서바이벌 티비 프로에서 707부대원이 이런 말을 했다.
“결과로써 과정을 입증한다.”
과정은 꽤나 엉망진창이었지만 결과는 합격이니 그간의 진심이 증명된 건가. 이깟 종이 한장에 기분이 이리 롤러코스터를 탄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디에라도 생색은 내야 하니 가족 단체톡에 ‘바리스타 2급’ 자격증과 ‘라떼 아트’수료증 두 장을 찍어 올렸다. 재작년 나이에 비해 다소 늦은 운전면허증 취득 후 면허증을 찍어 올린 이후로 무언가 연습한 성취의 결과를 알리는 건 처음이었다.성취의 기쁨은 다른 이들과 함께 하니 배가 된다. 이래서 다들 무언가를 배우고 자격증도 따고 그러는 거였구나. 잔뜩 주눅 들어있던 마음에 한줄기 희망이 들어오고 나니 며칠간 가슴 졸이느라 굽었던 어깨가 좀 펴지는 것 같았다.
흑역사가 된 나의 자격층 취득 스토리를 뒤로, 어느샌가 내 유튜브 계정 알고리즘은 ‘라떼 아트 스팀 잘 내리는 법’, ‘당신이 하트를 그리는 데 실패하는 이유’, ‘카페 사장 vlog’같은 커피 관련 영상을 찾아 도배시키고 있지만, 라떼 아트 선생님의 한달이 넘는 열정적인 수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라떼 위엔 화려한 하트 대신 의도치 않았던 토끼나 도토리 따위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고백해 본다. 괜히 시작했나, 나는 커피에 재능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잠시 스치지만 내가 누구인가! 늘 ‘조금 아쉽지만 이정도면 아주 오케이’ 를 외치며 이정도의 촉박한 시간에 이만큼이나 해낸 나를 비대하게 칭찬하는 성격(ENFP)아닌가. 라떼 아트 그거 조금 못 만든다고 카페사장 못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편해진다. 까짓거 시간 많은데 뭘. 연습 좀 해보자. 여전히 카페사장이 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