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7장-8장
이 장에서 저자는 기본 소득의 가치를 역설하고, 과소비가 내면의 불안으로 인한 것이며 소비가 주는 자유와 권력의 감정은 착각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1980년에 사망한 저자가 기본 소득에 대해 서술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는 최근 10년 정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오래된 개념이었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원칙이 오랫동안 인류를 통제했다. 낮은 생산력은 만인의 욕망을 채워줄 만큼 넉넉한 물질적 자원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물질 과잉의 시대가 도래했고, 기본소득은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인간이 굶어 죽을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인간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게 된다.
기본 소득이 노동 의욕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저자는 물질이 노동의 유일한 동기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자부심, 사회적 인정, 성취감, 명예 등은 인간이 경제적 이익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갈고 발휘할 수 있는 동기로 작용한다. 또한, 저자는 인간은 활동하지 않으면 괴롭고 인간의 본성은 게으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동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물질이 노동의 유일한 동기는 아닐지언정, 강력한 동기로는 작용한다. 자부심, 사회적 인정, 성취감, 명예를 느낄 수 있는 직업군이 얼마나 있는가? 학자, 예술가, 운동 선수 등 특수한 영역을 제외하고 나면 다수의 노동은 그 성격 자체가 권태로움, 자괴감, 사회적 무시, 소외감을 느끼게 하기 쉽다. 파편화되고 반복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노동이 현대 사회의 생산 시스템에서는 필요하다. 소득 말고 무엇이 그런 노동을 감내하도록 할 수 있을까? 기술이 극도로 발달하여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노동이 인간의 몫으로 주어지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그런 때가 오면 인간은 마땅히 할 일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영역이든 기계보다 뒤처질 것이기 때문이다.
굶어 죽을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유로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고소득의 사람들도 똑같이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본 소득의 가치에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 저자는 탐욕은 얼마를 갖고 있건 항상 결핍에 시달리게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본 소득 자체가 물질적 과잉일 때 가능한 것인데, 탐욕은 객관적인 상태를 떠나 주관적으로는 결핍되었다 느끼게 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기본 소득이 도입되기 위해서는 최대 소비 시스템을 최적 소비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최적 소비 시스템은 개인 소비용에서 공공 소비용 재화 생산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학교, 도서관, 공원, 병원, 대중교통 등의 시설을 생산하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다. 공공시설의 이용은 끝을 모르는 탐욕을 불러오지 않는다.
'소비하는 인간'이란 모든 것을 소비품으로 만드는 인간이다. 담배, 맥주, 마약, 책, 사랑, 섹스, 강연, 미술관 등 소비품으로 변신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은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에 떨고 있고, 고립되어 있으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소외감과 권태에 시달린다.
인간은 내면의 문제를 강박적 소비로 보상하지만, 이러한 소비를 질병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질병'이란 개념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 더 아플 때 경험하는 것으로, 모두 같은 질병을 앓을 때는 질병이라는 개념이 의식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의 공허와 불안은 강박적 소비를 통해 상징적으로 치유된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물로 자신을 채워 마음의 공허와 쇠약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소비를 과하게 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때의 나는 불안하고 외롭고 무력감을 느꼈다. 카드를 긁을 때 그 순간의 통쾌한 감정이 있었는데, 그 감정을 낱낱이 해부해보면 다음과 같다. 누구의 허락도 맡지 않고 마음껏 저질러 버릴 수 있다는 자유로움. 이 정도는 살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존감 회복. 별 것도 아니면서 과거의 나를 괴롭혔던 돈을 하찮게 대해버리겠다는 복수심. 실질적으로 변한 것은 없지만 삶에 많은 변화를 불어넣은 것 같은 상쾌함. 근본적으로는 그때의 나는 업무, 인간관계, 거주지, 삶의 방향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돈으로 사들인 새로운 물건이나 새로운 경험은 이런 고민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19세기에는 자유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사유재산의 소유와 상업 활동의 자유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착각했다. 20세기에는 소유로서의 생산수단이 전혀 중요한 범주가 아닐 것이라는 점을 예상치 못한 것이다.
오늘날의 (가짜) 자유는 소비 영역에 있다. 소비는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감정과 권력의 경험을 선사한다. 슈퍼마켓에서는 많은 돈을 쓸 필요도 없이, 질적으로 별 다를 것이 없는 물건 중 어떤 것에 총애를 선사할지 결정할 수 있는 왕이 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 그는 자신에게 제시된 여러 제품 중 선택하도록 부추김 당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갖고 싶은 것은 뭐든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없는 것은 애당초 즐길 수 없다고 믿는다. 그냥 앉아 있거나 걷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삶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없다면 기쁨도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존재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