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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무 Jul 31. 2022

활동적인 삶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마지막 장

# 고전적 의미의 활동성


    '활동성'의 개념은 20세기가 흐르는 동안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전통적으로 '활동성'은 우리 안에 깃든 정신력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표현이다. 이성, 감정, 미의 감수성의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 형태의 활동성은 관조적인 삶, 즉 진리 추구에 있다고 말한다. 스피노자에게 '활동성'은 한 행위가 나의 본질에서 온전히 나온 것이면서 이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수동적(passive)'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고통당하다(passio)'에서 나온 말인데, 만약 한 인간이 고통스러우면(수동적이면) 그의 행동은 본성에서 나와 이성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결정된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성이 인간의 본성을 이룬다고 본다.



# 변질되어버린 활동성의 의미


    그런데 포스트 산업사회에서는 활동성이 뜻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모두 활동적이라고 부르며, 다르게 정의하자면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행위를 활동이라고 부른다. 현대에 와서 활동성은 '분주함'이다.



# 자유와 강제


    인문주의 전통의 의미에서 자유란 강제 없이도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다. 삶에 강요에 따른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자유롭지 못하다. 

    외부의 강제는 그리스의 노예뿐만 아니라 현대의 노동자에게도 작용한다. 간접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노동자는 조직이 원하는 일을 하도록 강요된다. 그는 일할 것인지 아니면 굶어 죽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에게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뒷배가, 자본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목표가 된 경제적 자유는 자본을 획득하여 외부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보다는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을 것에 방점을 둔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나에게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 밖으로 펼칠 수 있을 자유이다. 외부의 강제가 제거된 삶을 무엇으로 채워 넣을지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대부분 하기 싫은 것은 하고 싶은 것에 딸려올 때가 많았다. 하기 싫은 것이 없는 하고 싶은 것은 수동적인 행위에 불과했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활동'은 하기 싫은 것을 동반했다. 하기 싫은 것을 감내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과 하기 싫은 것을 거부하며 하고 싶은 것도 접어버리는 것 중 선택해야 한다면, 전자를 선택해야 하지만 후자를 선택하고 후회한 적이 많다.

    또 다른 형태의 강제는 내적 강제로, 그 중 하나가 바로 불안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심한 공포와 불안이 담겨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에서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이다. 미친 듯이 일하는 것은 사실 불안이 자신을 몰아대고 있는 것이다. 단 한순간도 자신이 불안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일하고 또 일한다.

    삶이 불안할 때, 더 치열하게 살았다. 사실 그 치열함은 나의 삶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것에 열중할 때 잡다한 생각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해결하고 싶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지라도 다른 영역에서라도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삶이 안정이 되자 나는 치열함을 잊어버렸다. 나의 열심은 불안을 먹고 자라온 것이라, 평온한 삶에서는 아사하고 말았다. 나는 평온하면서도 힘들어 죽을 것 같지 않은 지금이 뭔가 잘못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행이 오히려 나에게 유용했고, 다시 어느 정도의 불행이 찾아와서 나를 채찍질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서는 안정된 삶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불안이 동기가 아니라 안정이 동기가 되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 불안과 가짜 활동성


    어떤 사람이 직업을 잘못 택해서 불안하다. 그는 새 직업을 택하면 어떨지 고민하는 대신, 더 많이 일해서 자신의 의혹을 잊어버린다. 혹은 결혼을 잘못했다고 치자. 그러면 자신이나 아내의 변화를 꾀하기보다 온종일 일을 해서 이런 상황이 주는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 애쓴다. 사람들은 행위로 도망친다. 꼭 일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일이 끝나면 운동을 하고 클럽에 갈 수도 있다. 그저 분주하기만 하면 된다. 단 한순간도 고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다시 불안이 고개를 내밀 테니 말이다.



# 고통스럽지만 무감각하다


    최대 생산과 최대 소비가 목표인 산업 시대에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소유에 쓰이는 도구가 된다. 오직 행동의 유용성만이 중요해진다. 강제적인 활동은 경제적이며, 겉보기에는 자유에서 나온 활동보다 더 유익하고 효과적일 때도 적지 않다. 그리하여 우리는 강제 노동자로 전락하며, 일이 단조롭고 의미 없고 따분하고 재미가 없어 고통스럽다. 이 사실을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여러 가지 증상이 그 고통을 나타낸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들여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안에 예감하며 감지하는 것들을 쫓아내 버린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자기 일이 얼마나 단조로운지 의식하면 자기 상황을 모두 바꿔야 하고 사회적 변화를 바라야 한다. 그 모든 것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기에 차라리 즐겁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강제 노동의 고통을 인식하지 않고 일을 더 많이 해서 무감각해지려고 한다.

    한 때 나는 격렬한 이성 신봉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성으로는 의식하지 못하는 직관이 더 정확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명료하게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불만족스럽다는 느낌.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이런 느낌을 나의 변덕으로 치부하며 수많은 객관적인 사실로 나를 설득하려고 했던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이것저것 일을 벌여 나를 바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에 나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는 스스로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이성으로 나를 이해시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쉴 새 없는 이벤트로 나의 날카로운 감각을 마비시키고자 했던 나의 노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 정치적 수동성


    현대인은 스스로가 매우 활동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매우 수동적이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척하며 이런저런 정치 이슈에에 대해 열을 올리지만, 실제로는 정치에 무관심하며 진정한 정치적 활동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서커스나 검투 경기를 보는 관중의 자세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것을 집어삼킨다. 내적 수동성은 대중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배자들도 피지배자와 마찬가지로 수동적이고 숙명론적이다. 그들은 관료적 절차법에 이끌려 갈 뿐,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올바른 활동성


    우리가 생존하려면 지금처럼 살아가서는 안 된다.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수동성을 의식하고 이 수동성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깨달음이고, 다음 걸음은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이다. 아마도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할 수도 있겠다. 말은 정말 쉬워 보이지만, 한번 해보면 얼마나 쉼 없는 행동의 강제와 분주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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