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작년에 홍콩에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가기 전부터 왠지 나는 홍콩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여행을 할 때 나는 도시보다는 자연에,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감탄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남들보다 번잡함과 시끄러움을 싫어하는데, 홍콩은 사진만으로도 그 정신없음이 전해져 왔다.
그렇다고 여행을 할 때 식도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도 아니고 홍콩 영화의 매니아도 아니어서 딱히 홍콩에 기대하는 것도 없었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홍콩이 여행지로 정해지고,
나는 여행을 가기 전에 유명한 홍콩 영화를 몇 편 보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전까지 내가 봤던 홍콩 영화는 패왕별희가 다였다.
장국영이나 양조위가 나오는 옛날 홍콩 영화들을 몽땅 나의 투 두 리스트에 등록해 두었다.
그러나 영화를 틀고 몇 분이 지나면 금세 지루함을 느꼈다.
유명한 영화라고 하니까, 홍콩의 감성을 느끼려면 알아야 한다고 하니까 보긴 봐야겠는데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한 편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홍콩 여행길에 올랐다.
홍콩은 생각했던 대로 덥고, 좁고, 더럽고, 빽빽하고, 가파르고, 시끄러웠다.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어서 딱히 실망할 거리도 아니었다.
사람이 더 많다는 빅토리아 피크는 갈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했고,
배가 고파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는 대신 식당에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홍콩의 하이라이트를 보지 않은 채 홍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할 수 있지만,
그 하이라이트마저 별로 기대가 되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 홍콩은 다시없을 것 같다는 확신만 얻은 채 한국에 들어온 것이 벌써 반년 전 일이다.
얼마 전, 우연히 영화 화양연화를 보았다.
여행 가기 전 나의 투 두 리스트에 있던 영화 중 하나였다.
보려고 두어 번 시도해 봤지만, 워낙 유명한 영화라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끝까지 봐지지가 않았다.
그랬던 그 영화를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
여행을 가지 않았다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식탁 위의 그릇과 컵, 젓가락이
실내의 복도와 가구와 선풍기가,
골목의 풍경이 눈에 띄었다.
그곳의 온도와 습도와 냄새가, 그것의 질감과 무게와 형태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희한하게도 홍콩을 갔다 오고 나니, 홍콩 영화가 더욱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아, 홍콩의 매력이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영화가 여행을 매력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반대로 여행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여행을 가기 전에 그 나라와 관련된 영화와 책을 보려고 하고,
막상 갔다 오고 나면 그 나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았다 생각하는지 구태여 다시 찾아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습만 성실히 하고 복습은 전혀 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예습보다도 복습이 훨씬 중요한 것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