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취향은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게 느껴 감각적인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또는 취향은 어떻게 다른지를 알고 지적인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결국 기쁨을 느낄 방법과 기회가 다양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만의 취향을 잘 가꾸어온 사람을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그건 한 끗 차이로 다른 것 같은 패션일 수도,
일관된 정서가 드러나는 플레이 리스트일 수도,
익숙한 책과 낯선 책이 뒤섞여 꽂혀있는 책장일 수도 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취향이라는 것이 없이 살아왔다.
취향은 곧 소비였고, 소비는 죄악이었다.
소비를 자랑할 때는 무언가를 가장 싸게 샀을 때뿐이었고,
더욱 자랑할 만한 일은 무언가를 사지 않고 버틴 것이었다.
소비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은 이렇다.
일곱 살 때였나, 문방구에서 200원을 주고 고무찰흙을 샀다.
고무찰흙으로 놀 생각에 신이 나있는데 언니가 딱딱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더니 엄마가 요즘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데 쓸데없이 이런 거에 돈을 쓰냐며 혼을 냈다.
그때 언니도 겨우 열 살 정도였다.
순간 죄책감과 수치심이 심장을 관통했다.
그때부터 내게 소비는 부모님을 괴롭히는 악행이었다.
사실 우리 집은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꿋꿋하게 극빈의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성장 과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취향의 기쁨에 대해 무지한 어른이 되었다.
애당초 그 기쁨을 모르다 보니 굳이 그 기쁨을 찾으려는 노력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서서히 취향이 어떤 의미인가를 깨달았다.
취향이란 수많은 것들을 자신만의 체에 걸러 반짝이는 것들만 남겨놓는 행위이다.
그렇게 선택된 반짝이는 것들만 내 삶에 들이는 것이다.
내 삶 속 반짝임에 감탄할 줄 아는 것이다.
취향이 없이 살면 무슨 문제가 생기나?
사실 별 문제는 없다.
내가 나를 대접할 수 없을 뿐이다.
내가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뿐이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알아봤다는 일상의 기쁨을 누리기 어려울 뿐이다.
이렇게 보니 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취향이란 지향하고 하는 삶의 태도를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삶의 태도는 취향을 만들고, 취향은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취향은 다시 삶의 태도를 상기시킨다.
현실에 치여 나의 존재를 까먹을 때, '나 여기 있어!'하고 고개를 빼꼼 내민다.
물론 인격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취향도 시간에 따라 변하게 된다.
그럴 때는 주저하지 않고
옷장이든, 책장이든, 살림이든, 냉장고든
변한 나에 맞게 바꿀 것이다.
나의 변화가 어느 한순간 일어나지 않듯 갑자기 과거와 뚝 단절되지 않게.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사는 것도 퍽 힘들지만
나와 맞지 않는 물건이나 감각에 둘러싸여 사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