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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가 나를 이렇게 괴롭힐 수 있구나.

by 케푸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 끓인 물이나 생수로는 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옛날부터 정수기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런지 자취를 시작할 때에도 다른 가전보다 정수기를 제일 먼저 설치했고, 자취를 하고 결혼 생활을 하며 9년 동안 한 브랜드의 정수기를 사용했다. 특별히 불편하지도, 그렇다고 크게 만족스럽지도 않았는데... 정수기와의 문제는 시골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시작됐다.


내가 이사 온 시골은 상수도가 없어(수돗물이 없음) 지하수를 파서 사용하는 산골로 지하수용 정수기를 사용해야 했다.

정말 다양한 기능이 있는 요즘 정수기에 비해 지하수용 정수기는 2000년대 초로 회귀한 것 같은 디자인에, 물탱크도 작고 비싼 정수기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위약금을 물지 않으려면 같은 브랜드 밖에 쓸 수가 없는걸...


지하수용 정수기를 설치하던 날 설치기사는 방문하기로한 시간에서 5시간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하지만 늦은 시간에도 와주신 것에 감사했고,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하셔서 피곤하시겠어요. 하며 초보 설치기사와 이야기도 나눴다.


그런데 설치하는 모습을 보니 왜 5시간이나 늦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도 한 시간 반 넘게 설치를 했음에도 정수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애초에 조리수를 설치할 수 없는 정수기 모델이었음에도 조리수를 설치한다며 싱크볼과 싱크대 선반을 뚫어버렸다.


그러면서 설치기사가 하는 말은

고객님이 조리수를 설치해 달라고 하셔서
설치하려고 싱크볼을 뚫었다.
다이소에 가면 싱크볼 막는 캡이 있으니
그걸 사다가 막으세요.


화가 났다.


조리수를 설치할 수 없는 모델이라는 걸 설치하는 내내 설치기사와 나는 알지 못했다. (정수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설치기사가 상급자와 통화를 해보더니 그제야 조리수 설치가 안 되는 모델임을 알았다.) 조리수를 설치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된다고 이야기해놓고 먼저 물어본 건 나니까 내 잘못이라고? (결국 대리점과 통화 후 보상받았다.)


그 후에도 정수기는 자질구레한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뭐 어쩌겠어, 위약금 물기 싫으면 그냥 써야지 하며 6개월을 버텼다.


내가 사용하는 지하수용 정수기는 물탱크가 꼭 있어야 하는 방식인데 '물탱크가 있다=정수기 업체 직원의 방문관리를 받아야 함'이다.


이 정수기와의 시작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9년 동안 썼지만
여기 브랜드와 내가 맞지 않는 것일까?


2개월의 한 번씩 담당자가 와서 필터도 교체하고 물탱크 청소도 하는데 항상 방문하기로 한 전날 연락이 와서 약속을 잡았다.

나는 친구와의 약속도 전날 잡지 않는다.

대게 며칠간의 계획을 세워두고 일을 처리하는 성향인 나에게 전날 전화로 방문 약속을 잡는 건 내가 며칠 전에 세운 일정을 모두 수정해야 했고, 내가 세운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하며 6개월간 3번의 방문 케어를 받았다. 그 3번의 방문케어 중 방문 당일날 관리자의 사정으로 캔슬된 것 한번, 두 번은 일정대로 받았고, 마지막은 전날 연락이 와 시간에 대해 조율하다가 임시로 시간을 정하고 내일 일정을 조율해 보고 연락 주겠다고 하곤 취소됐다는 연락도 확정됐다는 연락도 없이 관리자는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다.


정수기 그게 뭐라고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며 앞으로 약정기간 3년 동안 이 사람들을 계속 볼 생각을 하니 갑갑했다.


정수기를 교체해야겠어.


정수기 교체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정수기를 바꿔야겠다 다짐하고 3시간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다.


2023 정수기 사태(나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를 경험하며 나 스스로 스트레스 크게 만들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스트레스라는 건 터지기 직전의 여드름과 같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며 많은 것들을 해결하고 때론 미루는데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면 스트레스고, 미루지 않고 해결하면 성취감을 느낀다.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던 그 정수기는 나에게 큰 스트레스였다. 매일 같이 사용하며 사용할 때마다 들리는 고주파 음에 괴로웠고 이걸 3년 동안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위약금이 무서워 계속 미뤘다. 터지기 직전의 여드름 같던 정수기 스트레스는 계속 곪았고 아팠다.


그런데 해결하려고 방법을 찾아보니 해결 방법은 언제나 있다. 그게 간단하거나 복잡하거나의 차이지만.

정수기 렌탈업체는 그 브랜드 한 곳이 아닌데 왜 나는 귀찮다는 이유로,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그 브랜드만 고집하고 있던 걸까. 인터넷 검색 몇 번, 전화 몇 번으로 3년 동안 묵힐 줄 알았던 "여드름"이 쉽게 터졌다.

그 여드름을 터트릴 때(다른 브랜드 정수기와 계약할 때) 나는 큰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스트레스가 성취감으로 바뀌던 순간.


이젠 내 평생 그 정수기와는 빠이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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