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벨소리가 요란하다. 오전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애써 오는 전화를 무시했지만 이내 다시 울리는 벨소리. 파란 지붕아래 사시는 할머니다. 이름하여 파란 지붕 할머니.
아차- 파란 지붕 할머니 전화는 웬만해선 바로 받아한다. 전화를 받을 때까지 5번이고, 10번이고 하실 테니까.
- 네 할머니.
- 우리 아들 팬티 좀 사줘.
- 네, 이따가 할머니 집에 갈게요.
- (뚝)
할머니와의 전화통화는 항상 1분이 넘지 않는데, 이럴 바엔 애초에 전화를 빨리 받고 빨리 할머니 부름에 응답하는 게 내 오전 시간을 지키는데 더 효율적이겠다 싶었다.
부리나케 할 일을 끝내고 걸어서 5분 거리의 할머니 집에 갔다.
나는 15 가구 정도 살고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데, 이사오던 날 작은 시루떡을 건네며 인사를 드렸더니 마을에 젊은 사람이 이사 와서 참 좋아해 주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종종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고, 어느 날엔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시더니 이젠 전화로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는데 처음엔 두부, 무 같은 먹을거리를 사다 드렸지만 요즘엔 냄비, 아들 팬티 같은 공산품들로 종류가 다양해졌다.
- 할머니, 아드님 팬티 같은 건 시골 마트에 없고 인터넷에서 사는 게 더 싸고 편해요.
- 핸드폰으로 팬티를 사면 돈은 어떻게 내는겨?
여든다섯의 할머니는 핸드폰(인터넷)으로 물건을 사는걸 참 신기해하셨다.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인터넷 쇼핑이 할머니에겐 퍽 신기한 일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 신기한 일이지 싶다.
사람에게서 물건을 사지도 않았고, 사람에게 물건을 사지 않았으니 돈을 낼 수도 없고, 내가 물건을 받지도 않았는데 먼저 돈을 낸다는 것이 말이다.
- 핸드폰에 제 카드를 등록해 두고, 그 카드로 결제하면 돼요.
- 카드에 돈이 어떻게 있는겨?
- 할머니가 저한테 돈을 주시면 제가 은행에 가서 카드에 돈을 넣어요.
- 아이고 귀찮게 해서 미안하구먼.
서울에 살다 시골로 내려온 지 벌써 3년. 시골에서의 생활은 도시에서의 삶과 참 많이 달랐다. 우리가 으레 이용하던 그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거라는 걸, 우리가 쉽고 편하게 보냈던 일상의 어떤 것들이 누군가에겐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는 걸 많이 느꼈다.
시골에 내려오기 전 막연한 두려움 또한 내가 그동안 으레 누리던 편의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시골에 내려온 지 3년, 우리는 인터넷 강국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시골에 살아보니 시골생활은 문명에 뒤쳐질 거라는 나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인터넷만 있으면 서울에서 누렸던 택배 서비스도 쉽게 이용할 수 있고, 집 근처에 영화관은 없지만 나에겐 리모컨과 넷플릭스가 있고, 대형마트는 없지만 제철채소들을 나누어주시는 이웃들이 있다.
겪어보지 못하면, 아무것도 모른다.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항상 미안해하시며 사탕 한주먹이라도 쥐어주고 보내시려는 나의 파란 지붕 할머니.
오늘은 할머니가 주신 쪽파로 쪽파김치나 담가야겠다.